김상규 전 조달청장

 이단을 박해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아주 옛날에는 제사장이 왕이 되는 신정 일치 시대여서 신성모독인 이단은 당연히 박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신교는 박해가 상대적으로 덜했다. 인기가 있는 사상이나 숭배대상은 새로운 신으로 받아들이면 되니, 이단의 충격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일신을 표방하거나 명분을 강조하는 사상은 배타성이 강해서 이단을 참지 못했다. 특히 중세 유럽은 이단 박해와 종교재판으로 유명하다. 중세유럽은 사실상 신정국가였고 교황이 힘이 커질수록 이단에 대한 박해는 강화되었다. 교황의 권력이 절정에 이른 인노켄티우스 3세 때 박해가 가장 심했다. 

  중세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문화를 계승해서 야만을 길들이고 문명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어린시절 매로 종아리를 치면서 천자문을 가르치듯 이단도 엄격하게 다뤘는지 모른다. 더욱이 중세 교황이 다스리던 시대는 신학자가 정치와 행정까지 책임지던 일종의 신정국가였다. 이단을 허용해서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종교가 수백 개로 산산조각날 수 있고, 야만성을 타고난 인류를 도덕과 문명으로 묶어온 종교의 효험을 떨어뜨릴 우려도 있다. 교황청이 두려워할 만했다. 

  특히 다른 힘센 종교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여서 더욱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예루살렘 실지 회복을 위한 성전도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투르크의 영향으로 이슬람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고, 기독교보다 더 화려한 문명을 이룩한 때이기도 했다. 이슬람의 위협에 내부 결속이 필요한데 이단이 있으면 단결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이단에 관용적이었던 프랑스 남부지역의 알비파를 처단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공산진영과 자유 민주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냉전시기에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매카시즘이나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부자들은 대부분 이단자 박해에 동참했다. 이단세력이 종교를 가장한 정치적 급진주의가 아닌지 의심했고, 부유한 성직자와 부자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류계급의 여론은 이단을 단호하게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4-2).

 당시 군중은 이단을 미워했다. 일반 시민들은 교회의 공식적인 행동이 개시되기 전부터 이단자들에게 린치를 가했다. 자신들 보다 약하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군중이란 집단속에 숨어서 사디즘을 폭발시켰다. 공동체가 자신감을 잃고, 이단세력에 대한 두려움이 고조될 때 다른 생각을 참아내기 힘들다. 개는 무서워서 짖는다고 하지 않는가.

  드디어 대중을 이용한 왕들이 이단 박해에 앞장섰다. 단일한 종교적 믿음이 통치에 도움이 되었고, 부유한 이단자들도 끼어있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면 재정도 충실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층민의 도전을 막고, 하층민의 불만을 돌리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유태인학살 때처럼 이단자는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이단 박해는 플러스 섬이 되지 못한다. 아니 마이너스 섬이 되고 만다. 이단 박해로 유태인이 몰아낸 스페인과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위그노를 쫓아낸 프랑스는 산업의 쇠퇴로 경제가 아주 나빠졌다. 

  조선시대에 유교는 불교를 박해했다. 말기에는 천주교도 박해했다. 특히 성리학은 다른 사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직 주자의 해석만 존중했고, 양명학 등 주자와 다른 사상체계도 이단으로 봤다. 송시열은 중용해석을 주자와 다르게 한다고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게 했다.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획일적이고 정체된 사회로 변한다. 결국 나라를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의 북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이단 박해는 안정에 무게를 두고, 고민하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우리 몸속에는 바이러스나 병균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과도해져서 균형이 무너질 때 병이 생긴다. 이단도 일종의 바이러스나 병균일 수가 있다. 이런 것을 허용하면서도 사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면역력을 가져야 공동체가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다면 이단을 박해할 이유가 없다. 불교나 이슬람도 한 때는 이단이었고 예수님도 기존 유태교 교리와 다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최근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의 당대표 출마 무산이 논란이 되고 있다. ‘당내 민주화’ 등 쓴소리를 많이 하다 보니 미운털이 박혔다는 소문도 들린다. 민주당의 지난 선거 패배는 당내 민주화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동산 정책과 탈원전 정책은 삼척동자가 보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민주당 의원들이 청와대에 잘 보이기 위해 반시장적 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민심과 이반되어 정권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힘도 이준석 대표란 젊음을 이용해서 정권을 획득했다. 윤리위 결정 자체를 논평하고 싶지 않지만,선거가 끝나니 토사구팽되는 것 아닌지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주류와 다른 주장을 배척하는 것은 이단박해나 마찬가지다. 다른 생각을 용납할 수 있어야 건강한 정당이라 할 수 있다. 

 또 젊음이란 원래 좌충우돌하는 것 아닌가.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이리 저리 튀는 것이다. 눈치 보며 계산하는 태도는 젊음과 거리가 멀다. 각 당에서 젊음을 수혈하는 이유는 그 좌충우돌하는 에너지가 필요해서다. 좌충우돌하는 시행착오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도 있다. 한 때는 계급장 떼고 토론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젊은 패기를 관용하고 당내 민주화를 이루어 건전하고 역동적인 정당으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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