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능 사건,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벌어졌다 상상해보라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유언비어에 휘둘리는 건 정신력 나약해서다"
근대적 이성이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일종의 집단 정신병에 걸린 상태...마치 일본 증오의 역사적 사명 띠고 태어났다는 식
결국 북한과 중국에 유리한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이판능(李判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제시대인 1920년대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전차 기사로 일하던 하층 노동자였다.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일본에는 홀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 집에서 하숙을 한 것으로 봐서 그렇게 짐작한다.

그의 나이 27세이던 1921년 6월에 그는 아끼던 수건 3장을 도둑맞았다. 지금 시대에 수건은 흔해빠진 소모품이지만 당시에는 귀한 물건이었다. 당시 일본도 근대화되었다고 하지만 옷 한 벌 맞춰 입는 것이 지금으로 치자면 자가용 승용차 한 대 장만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행사이던 시절이었다. 조금만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평생을 옷 한두 벌로 버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 귀중품이던 수건을 도둑맞았으니 이판능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숙집 여주인을 의심했다. 하숙집 여주인과 언성을 높여 다퉜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그는 파출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파출소의 순경도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모르기는 해도 그의 일본어가 서툴렀던 것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하숙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하숙집 주인 부부와 다투다 구타당했다. 분노가 폭발한 그는 부엌에 들어가 칼을 들고나와 일본인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 길거리로 뛰쳐나가 지나가던 행인들을 무차별 살해한다. 한 시간 동안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무려 17명이었다. 그는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은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조선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무려 17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한일합방 이후 일본 사회에 조선인이라는 이방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예고편 같은 것이었다. 이후 ‘조센징(朝鮮人)’이라는 호칭에 일본인들의 경멸과 두려움, 기피의 감정이 담기게 된 것에는 이 사건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확한 인과관계를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이 사건은 2년 뒤인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의 잔인한 조선인 학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관동대지진은 도쿄 일대를 강타한 자연재해였고, 그 이전 이판능 사건도 도쿄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민간인들의 폭력적인 행동과 일본 공권력의 대응은 차원이 달랐다. 이판능 사건의 피해 규모가 컸고 범행 방식이 잔인했음에도 이 사건의 재판에서는 냉정한 근대적 상식이 작동했다. 이판능의 가족과 친지들은 일본인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했다. 변호사는 “사건 당시 피고는 극도의 흥분 상태였고,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였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이는 일본 사법 역사상 최초로 ‘정신병을 근거로 무죄와 감형을 주장한 사례’로 평가된다. 일본의 사법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재판부는 당시 제국대학 의대 교수였던 미야케 교이치 박사 등에게 이판능의 정신 감정을 의뢰했고, 이 감정을 이유로 재판은 4개월 동안 미뤄졌다.

미야케 교수는 이판능의 정신 감정 결과에 대해 “집주인을 살해할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지만, 길거리에 나가 무차별 살인을 저지를 때에는 의식을 잃고 몽롱한 상태였다”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이 감정 결과에 근거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판능은 항소했고 사건 발생 2년 6개월이 지난 1923년 12월 17일 항소심에서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판능은 1955년 61세로 사망했다. 천수를 누린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가령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 고용주와 싸우다가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 길거리로 뛰쳐나가 십여 명의 한국인을 무차별로 찔러 죽였다면? 대한민국 사법부가 딱 1세기 전 일본 사법부가 이판능에게 내린 판결보다 더 관대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사법부가 온정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이 사법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최근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온정주의적인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 사법부가 행사해야 할 최소한의 정의 구현 기능조차 무력화됐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판능에 대한 당시 일본 사법부의 판결은 최소한 민족주의적인 분노 등 원초적인 감정에 휩싸인 결과는 아니라는 것, 근대적인 사법 이성이 작동한 결과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판능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의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주장마다 편차가 크다. 조선총독부는 집회 참가자가 106만 명에 사망자가 553명이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한영우는 참여 인원 200만 명에 사망자 7509명(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2년)이라고 기록했다. 한영우는 통계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의한 인명피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일본 사법성이 공식 발표한 조선인 사망자는 300여 명 미만이다. 이 숫자는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각종 재판에서 일본 정부도 인정하고 확인된 조선인 희생자 숫자만 약 900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2,711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충격적인 것은 2013년 8월 원광대 사학과 강효숙 교수가 발표한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피살자 숫자이다. 강 교수는 당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사건'을 주제로 열리는 한·일 학술회의에 앞서 배포한 발표문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기존에 알려진 것의 3.4배에 해당하는 총 2만3058명이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이런 주장의 근거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제공하는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Ⅲ): 독일 외무성 편(2)' 속에 들어 있는 'MASSACRE OF KOREANS IN JAPAN <The List of killed bodies and places>'라는 제목의 사료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료의 말미에는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이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적혀 있다고 한다. 감정적으로 치우쳤을 가능성이 높은 자료라는 얘기이다.

무엇보다 1920년 당시 재일조선인의 숫자는 1915년의 3,917명에서 1920년에는 그보다 8배 가량 증가한 3만189명으로 국가기록원의 ‘재외 한인의 역사>일본의 재일한인>구한말~일제 강점기’ 항목에 명시되어 있다. 이걸 근거로 추산해보면 강효숙 교수가 주장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는 재일조선인의 76.4%에 이른다. 조선인들이 모두 관동 일대에 거주했을 리도 없는데 저런 피살 규모가 가능할까? 기본적인 교차 검증도 없는, 학자로서 최소한의 이성조차 상실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 피신했다. 물론 경찰서 안에까지 폭도들이 쳐들어와 조선인들을 학살하기도 했지만 요코하마 츠루미 경찰서의 오오카와 츠네키치(大川常吉) 서장처럼 원리원칙에 따라 조선인을 보호한 사례도 있었다. 계엄 출동한 일본군이 자경단을 공격, 해산시키고 조선인을 구출한 사례도 있다. 황도파를 비롯한 군벌이나 제국주의 성향의 군인들이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러일전쟁의 명장,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도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 유언비어에 휘둘리는 건 정신력이 나약해서이다'라고 사람들에게 훈시했다. 극우파이자 일본 국가사회주의의 거두였던 기타 잇키(北一輝)는 조선인 무정부주의자이자 훗날 천황 폭사 기도 사건의 주역이던 박열에게 피신처를 알선하기도 했다. 재난을 맞아 이성을 상실한 일본인들도 많았지만 상당수 일본인들이 저열한 민족 감정의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거론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일본 사회가 1세기 전에 이미 달성했던 근대적 이성이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소한 학계에서라도 최소한의 근대적 이성이 작동해야 할 터인데, 한국에서는 이것마저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근대에 대한 이해 자체가 극히 빈약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헌병 등이 다짜고짜 민가에 침입해 총칼로 어린 소녀를 강제로 끌어다가 위안부를 만들었다는 인식이 강고하다. 실제 위안부들이 대부분 20대 초중반이었던 것과 달리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를 모델로 한 소녀상이 그런 피해의식을 자극하고 있다. 근대가 어떤 것이고 근대 국민국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면 나올 수 없는 환상이다.

근대는 시장, 기업, 사유재산, 법치, 인권, 개인, 계약, 과학적 합리주의, 삼권분립 등의 원리와 가치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빠져도 근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물론 저런 시스템이 100% 완벽할 수는 없고 공동체의 성숙도에 따라 문제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 전체의 가치 체계와 프로세스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그게 무너지면 그건 더 이상 근대가 아니고, 근대 국민국가가 아니다.

근대 국민국가는 근대를 구성하는 가치들이 하나의 정치 체제(governance system)로 종합 구현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에서는 근대의 원리와 가치들이 더욱 긴밀하게 상호 결합하여 작동한다. 정치 권력은 기본적으로 배타성과 완결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원리에 구멍이 숭숭 뚫릴 경우 국민들에 대한 국가의 강제력이 작동 불가능하다.

일제시대에 일본 헌병이나 관헌들이 조선인들의 가정에 불법 침입해 어린 소녀를 끌고갔다고 해보자. 조선인 위안부 규모는 20만 명 설이 우리나라에서는 상식 비슷하게 통용되고 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소녀가 불법적으로 끌려갔는데 사회가 조용할 수 있을까? 당시에도 조선과 동아 등 언론이 존재했고 비판적인 기사도 많이 실었다. 대규모 불법이 조용히 덮인다는 게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조선시대와 다른 근대적 사법체계와 일선 치안기구가 존재했다. 그런데 자기 딸을 뺏긴 조선인들이 그냥 눈물만 삼키며 참았다는 건가? 불가능하다. 치안기구나 행정기구 등에 가서 난리를 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그런 상황을 결코 묵살하고 넘길 수 없다. 근대 국민국가의 질서에서 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일본은 20세기 중반에 자체적으로 비행기를 제작하고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도 만들었다. 이런 기술력은 법치와 인권, 계약 등의 근대적 가치가 살아 움직여야 실현 가능해진다.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소녀 사냥’ 같은 비극이 발생하고 조선총독부가 이를 방치하는 사회였다면 일본은 결코 그런 기술력이나 산업 기반을 갖출 수 없다. 당시 조선은 일본 본토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가질 수는 있다.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일본 문제에 관한 한 일종의 집단 정신병에 걸린 상태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일본을 이렇게 적대시하고 증오를 불태울 현실적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일본 증오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는 식이다.

지금 일본에 대한 증오는 결국 북한과 중국에 유리한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근대와 근대에 걸쳐 중국이 한반도에 끼친 피해는 일본이 끼친 피해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다. 일본은 한반도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고 그게 근대화의 성과로 이어졌다. 지금도 한·일 두 나라는 안보와 경제 두 측면에서 긴밀한 협력관계이다. 하지만 중국은 오로지 피해만을 입혔고 지금도 입히고 있다.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일본이 주도해 한반도에 도입한 근대적 가치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좌파가 주도해 건설한 1987년 체제 이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조선의 복벽이 추진되고, 전근대적 가치에 대한 미화가 확산되고 있다. 2세기에 걸쳐 피땀 흘려 달성한 근대화가 위험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의 배후에 북한과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가치에 의해 설계 및 구축된 세력이 있다는 심증이 깊어진다.

비이성적인 반일 정신병을 버리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일본이 문제가 아니다. 근대화가 문제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반일 정신병은 일본을 전혀 해치지 못한다. 지금 이 나라의 반일 정신병자들은 일종의 자위행위로 일본을 증오하지만 그 결과는 치명적인 자해일 뿐이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前 국민의힘 광주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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