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망언·폭거

지난 6월 8일 국회 의석수 167석의 거대 야당 대표 이재명이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초대를 받아 관저를 방문했다. 이날 싱 대사는 작심하고 준비된 원고를 15분여 낭독했다. 싱 대사가 이날 발표한 메시지는 외교적 망언이자 폭거나 다름없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중국대사의 망언을 전국에 생중계했다. 싱하이밍 망언의 핵심은 다섯 가지였는데, 해석은 필자가 그의 외교적 발언을 일반 용어로 바꾼 것이다.

첫째, 한중관계: “중한 관계가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 책임은 중국에 있지 않다.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이고 중한 관계의 기초다. 한국은 대만 문제 등에서 중국의 핵심 우려를 확실히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해석: 한국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대만을 접수하여 공산 통일을 달성하려는 중국의 입장을 열렬하게 지지해야만 한다.

둘째, 대중 무역적자: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 확대는 ‘탈(脫) 중국화’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양국은 산업망과 공급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제 구조다. 한국이 중국 시장에 대한 투자 전략을 시의적절하게 조정하면 중국 경제 성장의 보너스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해석: 한국은 중국을 왕따시키고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패권 놀음에 편승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라.

셋째, 국제관계: “미국이 전력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일각에선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배팅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다. 중국의 패배에 배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해석: 미·중 패권 전쟁에서 한국이 중국에 배신을 때리고 미국 편을 들면 반드시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니 알아서 처신하기 바란다.

넷째, 남북관계: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한반도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입장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중국은 남북 대화를 통한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고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해석: 한반도 평화는 한반도 비핵화만 되면 간단히 해결된다. 미국의 핵우산 운운하며 미국 핵무기를 남한에 배치하는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 한미 훈련을 중단하면 북한 도발도 사라져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다섯째, 일본 문제: “일본은 곧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결정을 내릴 것이다. 일본이 태평양을 자신의 집 하수도로 삼고 있다. 중국과 한국은 자국민의 생명 안전을 지키고 해양 생태환경 보호를 위해 일본의 오염수 해양 방류를 저지하자.”

해석: 중국 원전의 삼중수소 해양 투기는 주권국으로서 당연한 권리이고,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인한 삼중수소 배출은 범죄 행위다. 한국은 중국과 손잡고 일본을 악당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서기 바란다.

대한민국을 중인환시리에 공갈협박한 후 만찬을 즐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
대한민국을 중인환시리에 공갈협박한 후 만찬을 즐긴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 1895년 5월 10일은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날

1895년 4월 일청전쟁에서 일본에 연전연패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은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약하고 조선을 포기했다. 이때 비로소 조선은 500여 년 중국의 속국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고종은 같은 해 5월 10일을 국경일인 ‘독립경일(獨立慶日)’로 지정했다. 5월 14일엔 독립경일을 축하하기 위해 국내외 주요 인사와 각국 외교관을 초청하여 창덕궁 연경당에서 성대한 원유회(園遊會, 가든파티)를 개최했다.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지 128년 후, 대한민국 거대 야당 대표 이재명은 싱하이밍 중국대사의 도발적 망언을 머리 조아리며 공손히 가슴에 새긴 후 만찬을 즐겼다. 이런 모습에 분노한 전현직 교수들의 모임인 정교모(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 모임)는 ‘이재명 대표, 짜장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가’라는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이재명 대표는 싱하이밍 대사를 구한말 조선의 목줄을 쥔 상왕(上王)이자 총독 역할을 맡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로 착각하고 이런 일을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은 아닐까?

#. 대한민국을 속방국 대하듯 멸시하는 중국

1895년 중국이 일청전쟁에서 패배하여 조선에서 퇴출당할 때까지 조선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은 조선은 중국의 충실한 속방, 즉 중국 천자(天子)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일개 제후국이었다. 중국은 수교한 국가에는 정식 외교관인 흠차대신을 파견했다.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라 제후국에 불과하므로 이곳에 파견하는 외교관은 흠차대신이 아니라, 그보다 급수가 한참 하위 인물에게 총판조선상무,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統理交涉通商事宜) 따위의 해괴한 직함을 주어 부임시켰다.

1883년 가을 총판조선상무(조선에서 청나라의 상업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파견하는 관직)로 부임한 천슈탕은 서울 도착 즉시 사대문에 “청은 조선의 종주국으로, 조선과 각국이 통상하여 이권을 도모하도록 특별히 허락한다”라는 오만방자한 도착 성명서를 내걸었다(임계순, 「한로밀약과 청의 대응」, 『청일전쟁을 전후한 한국과 열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64쪽).

1885년 11월 17일에는 천슈탕의 후임으로 불과 26세의 청년 위안스카이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부임시켰다. 그의 관직 품계는 지방행정관 비서에 해당하는 4품 도원(道員)이었고, 외교관 서열로는 공사보다 지위가 낮은 총영사급이었다. 조선 외교 총책을 맡고 있던 북양대신 직에 총독 리훙장(李鴻章)은 이러한 애송이 청년에게 “조선으로 건너가 국사(國事)를 감독하라”라고 명했다.

26세의 청년이 조선의 상왕으로 군림하여 식민통치하듯 내정과 외치를 주무른 위안스카이.
26세의 청년이 조선의 상왕으로 군림하여 식민통치하듯 내정과 외치를 주무른 위안스카이.

오늘날 한국은 대통령 최측근 인물 중에서 비중 있는 인사를 엄선하여 주중 대사로 보낸다. 그렇다면 중국이 임명하는 주한 중국대사는 어떤 인물인가. 중국은 미국에는 외교부 차관급, 일본에는 외교부 차관보급, 북한에는 대외연락부 차관급을 대사로 보내면서 한국에는 은퇴 직전의 국장급·부국장급 퇴물을 임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런 외교적 무례에 대해 우리 정부가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외교적 결례를 밥 먹듯 자행하는 중국의 고압적 행위는 130여 년 전이나 후에도 영락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아직도 중국이 대한민국을 속방 조선 대하듯 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내용증명 아니겠는가.

#. 조선에 나타난 위안스카이 대원군 압송, 갑신정변 진압

위안스카이가 처음 조선에 파견된 시기는 1882년 임오군란 때다. 당시 그는 우창칭(吳長慶) 제독 휘하의 미관말직 문관으로 우리 역사에 등장했다. 위안스카이는 20대 초반으로 과거에 낙방하여 관직 구경도 못 했던 인물이다. 독학으로 병서를 공부하던 백면서생이 집안 인맥의 도움으로 조선에 건너오면서 팔자가 피기 시작했다.

조선에 파견된 청군은 구식군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원군을 체포 압송한다. 이때 대원군 체포에 앞장선 인물이 위안스카이였다. 아무리 책봉-조공 체제하의 속방이라 해도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실력자를 납치하는 폭거가 자행되자 조선 지도부는 경악했다. 톈진(天津)으로 끌려간 대원군은 ‘영원히 귀국 불가 및 유배’ 조치를 당했다. 그는 톈진 서쪽 180㎞ 지점에 있는 바오딩부(保定府)의 행정관청에 구금돼  화폭에 난을 치며 세월을 죽이는 신세가 되었다.

1884년 김옥균 일당이 갑신정변 쿠데타를 일으키자 위안스카이는 즉각 군대를 출동시켜 창덕궁을 공격한다. 병력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청군은 일본군·개화당 연합군을 제압하고 개화당과 한통속이 되어 움직였던 고종을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한다. 수도 서울이 평온을 되찾자 위안스카이는 왕궁에 들어가 고종의 옆방에 머물며 고종을 감시했다. 그리고 모든 국가 사무는 자신의 지시를 받으라고 명했다(허우이제 지음·장지용 옮김, 『위안스카이』, 지호출판사, 2003, 48쪽).

#. 조선을 식민 통치한 주인공

위안스카이는 조선을 전통적 의미의 속국이 아니라 부용국(附庸國), 즉 큰 나라의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로 간주했다. 근대 국제법에 규정된 식민국으로 조선을 상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함에 ‘총독(resident)’이라고 새겼고, 서울 주재 외교관들에게 자기 직함을 영국의 인도 주재 총독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이정식,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150쪽).

위안스카이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괴상한 직함을 달고 나타난 1885년부터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894년까지 9년간은 ‘위안스카이가 통치한 조선’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노골적이었고, 조선은 독립국으로서의 실체를 거의 잃었다(다보하시 기요시 지음, 김종학 옮김, 『근대일선관계의 연구(하)』, 일조각, 2016, 56쪽).

당시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했던 미국인 국제 변호사 오언 데니(Owen N. Denny)는 위안스카이에 대해 “범죄성, 부당성, 잔혹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국제관계 역사에서 위인스카이 같은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청국의 발굽으로 조선의 목을 짓누르기 위해 조선의 국내 발전을 지향하는 모든 노력을 반대했다”라고 비판했다(O. N. 데니, 신복룡·최수근 역주, 『청한론(淸韓論)』, 집문당, 1999, 23쪽).

이처럼 무례한 행동에 조선의 대신들이 반발하자 위안스카이는 “나는 단순한 통상사의가 아니라 청 황제에 의해 조선 왕조의 국정 전반에 관여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라며 깔아뭉갰다(기무라 간 저·김세덕 역,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제이앤씨, 2017, 219쪽). 싱하이밍 대사의 내정 간섭 망언의 수위를 보면 130여 년 전 위안스카이의 방약무인한 언행과 어찌 그리 닮은 꼴인가.

#. 고종을 폐위하려 했던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내정과 외치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면서 가장 심기가 불편해진 인물은 고종이었다. 고종이 이런 일을 인내하고 넘어가기에는 권력욕이 지나치게 강했다. 급기야 고종은 위안스카이의 간섭과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1차 조러 밀약을 추진한다. 이것은 늑대(청)를 물리치기 위해 호랑이(러시아)를 방안에 들여놓은 꼴이 되었다. 글로벌 차원에서 러시아 봉쇄 작전을 펼치던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를 점령하고 러시아에 “한반도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렸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극비리에 제2차 조러 밀약을 추진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민비의 총애를 받던 민영익은 “이러다 잘못되면 왕조가 폐멸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포감을 느꼈다. 그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 세력을 축출하겠다는 고종의 위험천만한 행동을 위안스카이에게 밀고한다. 제2차 밀약설의 윤곽이 드러나자 조선의 상왕이나 다름없던 위안스카이는 시쳇말로 ‘뚜껑’이 열렸다.

두 차례나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러 밀약을 추진하다 발각되어 위안스카이에게 폐위당할 뻔 했던 고종.
두 차례나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러 밀약을 추진하다 발각되어 위안스카이에게 폐위당할 뻔 했던 고종.

그는 1886년 8월 6일, 직속상관인 리훙장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고종 폐위 건의를 올린다.

“우리 청은 조공국을 다스리는 데 너무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조선은 우리가 다른 나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으로 알고 점차 방자해져 이제는 우리를 신경 쓰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 생각에 러시아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고종이 러시아 군대를 끌어들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군과 육군을 조선에 보내 고종을 폐하고, 왕족 가운데 현명한 자를 새 임금으로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허우이제 지음·장지용 옮김, 앞의 책, 72~73쪽).

위안스카이는 새 국왕 후보를 물색하기 위해 비밀리에 왕족들과 접촉했다. 위안스카이가 고종 폐위를 위해 긴박하게 움직이자, 이번에는 폐위 관련 정보를 고종에게 흘렸다. 고종과 위안스카이 양쪽으로부터 표적이 된 민영익은 고종·민비의 비자금을 들고 홍콩으로 도주했다. 그는 홍콩에서 가장 호화로운 빅토리아 호텔의 스위트룸을 통째로 빌려 안락한 망명 생활을 즐겼다.

제2차 조러 밀약을 응징하기 위해 위안스카이가 요청한 청나라 북양함대 군함이 인천에 도착하면서 고종의 폐위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북양함대가 인천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하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는 1886년 8월 28일, 고종에게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보내 조선이 청과 러시아 중 어느 나라를 종주국으로 택할 것인지 명확하게 밝히라고 협박했다.

위안스카이는 이 글에서 “조선은 영토는 3,000리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0만 명도 못 되며, 거두어들이는 세금도 200만 석이 못 된다.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여 모든 나라 중에서도 가장 빈약하기 때문에 조선은 자신들을 도울 나라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영국과 프랑스는 물불 안 가리고 영토를 탐내며, 미국과 독일은 다른 나라를 도우려는 의지가 없다. 일본과 러시아는 국제정세에 얽매여 조선을 도울 여유가 없다면서 “조선이 기댈 곳은 청국뿐이며, 청과 조선은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로 묶인 종주국과 속국이다. 청과 조선이 굳게 결합하면 이익도 크다”라고 주장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이 청에 의지해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其利有六)와 조선이 중국을 배신하고 청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면 네 가지 해로움이 있다(其害有四)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안보를 보장하는 나라, 지극히 가깝고 크고 어질고 공정한 나라를 찾아 구원받으려면 청국 이외의 다른 나라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위안스카이가 고종에게 보낸 ‘조선대국론’은 127년 후 싱하이밍 대사가 이재명 대표에게 통첩한 망언과 완벽한 판박이라는 사실을 눈치 빠른 독자들은 발견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늘 계획대로만 진행되지는 않는 법이다. 청이 무력으로 조선 국왕을 갈아치우면 영국이나 러시아가 간섭할 우려가 있었다. 리훙장은 위안스카이에게 “조선 국왕 교체 문제는 더 이상 사건을 확대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림으로써 고종 폐위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그 대신 리훙장은 위안스카이에게 “더 이상 조선 국왕과 왕비의 위험천만한 외교 행태를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후 조선의 내‧외정에 대한 위안스카이의 간섭은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때부터 8년여, 고종과 민 씨 척족들은 위안스카이에게 바짝 엎드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존재가 되었다. 1894년 동학란 여파로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때까지,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황제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했다.

#. 차관을 미끼로 조선의 목줄을 쥐다

고종과 조선 조정이 위안스카이에게 설설 긴 이유 중의 하나는 ‘돈’이었다. 고종은 국고가 텅 비어 말라 죽을 형편이 되자 해외에서 닥치는 대로 차관을 빌려 급한 불을 껐다. 1885년 조선 정부는 독일계 세창양행으로부터 연 12%의 고율 이자와 호남지역 세미 운송권을 이권으로 제공하고 차관 2만 파운드를 빌렸다. 세창양행은 연간 3만~5만 석의 세미 운송권을 얻어내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재정이 완전 바닥 난 조선 정부가 차관 원금과 이자를 무슨 수로 갚을 수 있었겠는가. 상환 기한이 지나 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상환 금액이 10만 냥에 이르렀다. 상환 압력이 심해지자 견디다 못한 고종은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위안스카이의 주선으로 1892년 8월 19일, 조선에 진출한 화교 기업 동순태(同順泰)로부터 10만 냥을 빌려 세창양행의 차관을 갚았다(이양자, 『조선에서의 원세개』, 신지서원, 2002, 131~132쪽).

조선 정부는 세미 운송권을 외국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차관을 얻어 선박을 도입하여 직접 세미 운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1887년 타운센드 양행과 일본 다이이치(第一)은행으로부터 14만 냥의 차관을 도입하여 윤선(輪船) 세 척을 도입했다.

이 차관도 제때 갚지 못해 상환 독촉에 시달리자 고종은 또다시 위안스카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 동순태로부터 10만 냥을 차관한 지 42일 만인 10월 6일, 또다시 10만 냥 차관을 빌린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동순태도 차관 제공 대가로 짭짤한 이권을 요구했다. 동순태는 조선 정부와 합작으로 한화윤선공사(韓華輪船公司)를 설립하고 50톤 급 소형 기선을 구입하여 15년간 인천-서울 간 청국 상인 화물과 조선의 세미 10만 석 운반권을 얻어냈다. 동순태는 이 사업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고 막대한 이권을 차지한 조선 진출 화교 기업 동순태의 서울 사무실.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고 막대한 이권을 차지한 조선 진출 화교 기업 동순태의 서울 사무실.

동순태 차관 20만 냥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잡다한 채무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일본 은행으로부터 빌린 거액의 차관을 상환하지 못해 시달리자 고종은 또다시 위안스카이에게 SOS를 날렸다. 이번에도 위안스카이의 주선으로 상하이의 영국계 후이펑(滙豊)은행에서 차관 5만 냥을  빌려 일본 빚을 갚았다.

외국 자본은 차관 도입 대가로 막대한 이권을 탈취해간 덕분에 조선 경제는 곳곳에서 파탄이 났다. 그 결과 차관을 도입한 몇 년 후에는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더 많은 차관을 빌려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1889년까지 조선 조정의 외채 총액은 130만 냥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위안스카이의 차관 공여 정책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직속상관인 리훙장은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차관 제공을 도운 행위에 대해 “쓰다듬는 가운데 제어의 뜻을 두고, 조선의 이권을 조정하여 속번을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치하했다. 

싱하이밍 대사가 이재명 대표에게 “한국이 먹고 살고, 평화를 유지하려면 중국 품에 안겨야 한다”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모습을 보면 중국의 막가파 식 외교 행태는 1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완벽한 닮은 꼴이라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 일청전쟁 발발 직전 중국으로 도주한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는 허난성(河南省) 지주 집안 출신인 위(于) 씨와 혼인했다. 위 씨는 문맹인 데다가 예절을 전혀 모르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원기 왕성했던 위안스카이는 정실부인 외에 중국어로 ‘이타이타이’(姨太太)라 불리는 첩을 9명이나 두어 그들로부터 총 32명의 자녀를 생산했다. 조선에서 황제처럼 군림하는 동안 위안스카이는 안동 김씨 집안 여성을 첩으로 삼았다.

위안스카이와 한국인 여성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가 세계적인 핵 물리학자 위안자류(袁家騮) 박사다. 오른쪽은 그의 부인 그의 부인 우젠슝(吳健雄) 여사.
위안스카이와 한국인 여성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가 세계적인 핵 물리학자 위안자류(袁家騮) 박사다. 오른쪽은 그의 부인 그의 부인 우젠슝(吳健雄) 여사.

김씨 여인은 1890년 아들 위안커원(袁克文)을 출산하여 위안스카이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위안커원은 후에 중화민국(타이완)의 장기·마작 유단자로 명성을 날렸는데, 위안커원의 셋째 아들이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위안자류(袁家騮) 박사다. 위안스카이는 김 씨가 데려온 몸종 이 씨와 오 씨까지 모두 이타이타이로 삼아 이들로부터 모두 7남 8녀의 자녀를 생산했다(이양자, 앞의 책, 15쪽 참조). 위안자류 박사는 미국에 유학하여 핵물리학을 공부했고, 그의 부인 우젠슝(吳健雄)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여성과학자로 ‘중국의 마리 퀴리’로 불린다.

위안스카이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며칠 전인 1894년 7월 19일, 러시아 무관의 중국인 하인으로 위장하여 서울을 탈출, 본국으로 도주했다.   칼럼을 통해 싱하오밍 대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오만방자하게 조선의 내정 및 외교를 주무르던 중국을 무력을 동원하여 이 땅에서 내쫓고 조선을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만들어 준 나라는 그대들이 씹어먹을 듯 비난하는 일본이었다. 6.25 때 당신들의 불법 개입을  물리쳐준 나라는 미국이었다. 당신들이 아무리 직접화법으로 공갈협박을 해도 절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은 한미일 해양동맹의  가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임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