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70주년이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 교섭 경과를 보면서 크게 우려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자마자 미군이 그냥 철수해버릴까 봐서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 세계 GDP의 거의 절반을 생산할 정도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영국의 패권을 평화적으로 이어받았다. 그런데도 소련의 공산 세력을 막아낼 능력을 자신하지는 않았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외교정책 연설에서 극동 방위선에 일본과 필리핀까지 포함시켰다. 전략적 가치가 덜하다고 본 한반도와 대만은 제외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 세력의 도전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직관으로 즉각 유엔안보리를 소집하여 불법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유엔군 파병을 결단하였다. 그해 10월 중공군이 개입하여 38선 근방에서 한없이 밀고 밀리던 전쟁이 3년이 지나서야 휴전으로 멈추게 되었다. 전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다.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다치거나 납북되었다. 인구의 절반이 이산가족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겠다고 선거공약을 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휴전을 서두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방위조약 없는 휴전에는 반대라고 소리 높였다. 차라리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방위조약을 받아내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반공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렸다. 아이젠하워는 한밤중에 깨어났고, 영국의 처칠은 면도하다가 베었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을 달래느라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하고 월터 로버트슨 국무성 극동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16일간의 집중적인 협상 결과 7월 12일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였다. 포로의 자유귀환보장, 상호방위조약체결 합의, 한국의 자유·독립·통일 실현을 위한 공동노력 등을 약속하는 합의였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로버트슨 특사의 중요성은 전 세계가 한국이 미국의 괴뢰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데 있다”고 회고하였다. 그 결과 10월 1일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였다. 한미동맹조약을 맺은 것이다. 어느 일방 당사국이 제삼자로부터 침략받으면, 타방 당사국이 지원해야 한다. NATO나 일본에 대한 방위책임과 똑같은 의무다. 변방의 작은 한국에 대해 초강대국 미국이 방위 의무를 약속한 것은 깜짝 놀랄 일이다. 미국은 결코 한미 동맹조약에 주도적이지도 않았고, 흔쾌하게 맺은 것도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집요한 고집에 할 수 없이 응한 것이다.

  1972년 베트남 평화를 위한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 미군이 철수하고 나서 3년 만인 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소멸해버린 예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은 얼마나 대단한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역사의 흐름과 국제정세 판도를 읽고 나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거인(巨人)이었다. 이미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 시기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때,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저서를 통해 일본의 미국침공을 6개월 전에 경고하였었다. 1917년 볼셰비키 소련의 등장을 보고서는 ‘공산주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논설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 본능을 무시한 공산주의는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에 앞서 조선 말기인 1899년 고종에게 왕정 개혁을 요구하다가 국사범으로 몰려 5년 7개월간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었다. 

  1948년 건국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았고, 6.25 전쟁 휴전에 앞서 한미동맹을 약속받음으로써 북한의 재남침을 봉쇄하였다. 그 기초가 이치에 맞고 튼튼하였기 때문에 지난 70년 동안 온 국민이 흘린 피와 땀이 대한민국의 성공으로 결실을 보았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 여섯 번째 종합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했고,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탈바꿈하였다.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던 한국전쟁은 이제 ‘승리한 전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95년 7월 27일 워싱턴 광장 한국전참전기념비 개막식 행사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자랑스럽게 선언하였다. 단순히 한반도 안에서의 승리한 전쟁을 넘어서, 국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낸 세계적 차원의 승리한 전쟁이라고.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경제력은 그 후 북방정책을 뒷받침하여 공산권에 충격을 주었고, 88올림픽은 동유럽의 민주화에 등불이 되었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는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위력을 증명한 것이다.

  한국은 이제 변방의 작은 나라가 아니다. 미국에도 없어서는 안 될 주요 동맹국이 되었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지역 중심 국가로서 미국과의 동맹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군사동맹을 넘어서 경제동맹. 기술동맹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미·소 패권 경쟁이 미·중 패권 경쟁으로 전이된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한국은 일본, 인도, 호주와 함께 자유민주주의 협력체의 없어서는 안 될 일원이 되었다. 특히 남중국해는 한국과 일본의 에너지 공급을 위해 불가결한 생명선으로서 항행 자유가 필수적이다. 한국도 주요한 이해 당사국으로서 국제규범 준수를 위한 강력한 대변자가 되었다. 평택 한미연합군사령부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전개에 핵심 기지가 되었다.

  한미동맹 70년의 가치는 대단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이 미국의 방위약속을 얻어내어 대한민국 성공의 받침대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기간 이승만 대통령의 집념 때문에 미국 정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가기 어렵다는 불만을 품었고, 이승만을 정권에서 축출하기 위한 소위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을 감행하려 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학을 떼었다’는 심정이었다. 이승만 축출 계획의 대안으로 거론되었던 백선엽 장군이 애국자 이승만을 배신하는 작전을 거부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1960년 4.19학생혁명으로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한 과오는 있지만, 자유대한민국의 기초를 세우고, 한미동맹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가 번영하는 토대를 마련한 크나큰 공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과거 김일성과 절친했던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공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제2차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 지도자 중에서 자신들보다 한 단계 더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미국과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를 통해 국익을 최대한 확보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잘 사는 나라였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한 젊은이들에게 종북좌파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였다고 부정적인 점만 부각해서 가르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이 1945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을 창립하고 1946년 2월 8일에는 공산주의 정권 형태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사실은 모른 척하고, 이승만에게 남북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다. 북한 김일성이 정권수립의 선수를 친 것을 보고 이승만이 통일정부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한 발언을 꼬투리 잡는 것이다.

  햇볕정책으로 망해가는 북한 정권을 살려낸 김대중의 기념관은 궁전처럼 지었으면서도,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동상을 광화문 광장에 세우지 못하게 막았다. 이제 7월 27일 다부동 전적지에 트루먼, 백선엽 동상과 함께 이승만 동상을 제막하게 된 것은 다행이다. 또한 4.19혁명 주도세력과 전직 대통령 자제 5인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국민적 호응이 크게 일어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한미동맹 70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진정한 공헌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왜곡한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잡는 지름길이다.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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