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수 프리덤뉴스 발행인

1. 문제 제기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 함은 어떤 국가나 사회가 체제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정의’를 세우는 일련의 과정이나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대한민국은 건국 직후부터 ‘과거사 청산’이라는 진통을 겪었지만, 지금도 온갖 과거사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거나 새로운 과거사위원회가 태동하고 있는 실정이며, 이를 위해 수많은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토록 많은 과거사 청산 과제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은 바로 ‘친일청산’이 아닐까 싶다.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지낸 이용우는 전환기 정의의 차원에서 프랑스에서 벌어진 ‘대독협력자 숙청’에 대한 연구를 담은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라는 저서에서 “우리 역사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로 인한 친일 협력자 처벌 무산, 5.16쿠데타, 1979~1980년 신군부 권력 장악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과거청산의 기회가 무산된 역사”라고 하면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청산 작업이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했는데, 아마 이런 관점을 국민 대부분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2. 해방과 체제 전환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승전국 미국은 포츠담회담에서 일본제국주의 해체와 미국의 패권 확립에 주안점을 두었다. 일본의 패망과 항복선언은 있었지만 항복선언 어디에도 한일병합조약의 무효를 언급한 것은 없었다. 1945년 9월 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같은 달 25일 군정법령 제2호(Concerning Property Transfers)로 같은 해 8월 9일(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통보한 날) 현재 남한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모든 재산을 미군정청의 관리로 이관했다. 해방 후 국내 각종 통계자료에 따르면 이때 귀속된 일본인 사유재산의 가치는 총 52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 금액은 당시 국내 총재산의 80~85%에 달했다.

그러나 군정법령 제2호는 일본인 사유재산의 소유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고, 재산을 처분한 경우에는 거래대금을 조선은행에 강제 예치하도록 했다. 적국의 재산이라도 사유재산의 경우에는 그 소유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국제법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38선 이북의 소련 군정이 일본 또는 일본인 소유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자 미군정청은 군정법령 제2호를 변경하여 관리하던 모든 재산 전부를 군정청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때부터 일제시기 일본인 소유의 사유재산과 조선총독부 소유의 공적재산으로 미군정청에 귀속된 재산은 ‘귀속재산’이라고 지칭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1907년 국제법으로 승인된 ‘헤이그 육전법규(Hague Regulation land warfare)’ 제46조 ‘적지 사유재산 불가침 원칙’에 명백히 위배된 것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시점부터 대한민국 건국 시점까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체제 전환기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기에 있어서의 ‘정의’를 세우는 일은 간과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전환기의 정의를 세우는 1차 작업은 미군정청에 의해 국제법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매우 과도하게 수행되었다.

한국에서 살던 일본인 민간인은 1944년 5월 1일 기준으로 71만 명에 달했는데, 그중 46만 명이 남한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군정청에 의하여 모든 재산을 몰수당해 삶의 기반을 상실한 채 살벌한 반일 광풍을 피해 맨몸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조선 거주 일본인 가운데 39.5%가 화이트칼라 및 지식인 계층이었고, 상업 및 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각각 18%였다고 한다. 한편 해방 전 공업부문 기술자의 조선인과 일본인 비율은 대략 2:8로 일본인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이렇게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조선 사회의 상층 지배구조를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 패망 직후 북한에서는 소련 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들을 강제로 억류한 후 수년간 기술이전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반면 남한에서는 일본 기술자들이 모두 피신하듯 일본으로 돌아감으로써 일본의 자본과 기술의 유입이 단절되었고, 북한의 단전 조치까지 겹치면서 남한의 산업은 일거에 마비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3. 제국주의의 잔재청산과 친일청산은 다른 문제이다.

한일병합조약을 전후하여 조선민사령이 시행되는 등 서구 문명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참고로 조선민사령은 일본 민법을 베낀 것으로 현재의 민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근대화’라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한마디로 ‘서구문명의 유입’ 또는 ‘서구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에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격렬한 근대화를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세계의 질서가 바뀌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질서의 변화가 먼저 일어났다. 따라서 제국주의 잔재는 새로운 질서와 다가올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서는 청산되어야 했다. 해방 직후 과거사 청산은 ‘제국주의 잔재청산’이어야 마땅했고, 이 전환기의 정의는 남한의 미군정청과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의하여 철저히 수행되었다. 총독부의 정치적, 법적 지배의 종식과 함께 일본인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배의 근간을 이룬 물적, 인적 기반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상실되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지 체제가 청산된 예는 세계사적으로도 가히 없다고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대두된 친일파 청산의 문제는 전환기의 정의로서 다루기에는 다소 부적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가 전환기의 정의를 세우는 것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식민지 시기 ‘친일’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국 직후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기억을 다루는 정치’로서의 과거사 청산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현재도 진행 중인 대부분의 과거사 청산을 명분으로 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 역시 ‘기억을 다루는 정치’에 불과하다.

4. 대한민국의 건국은 성공적 식민지 청산의 직접적 증거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서구문명의 유입과 함께 조선에 인적, 물적, 문화적 부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제국주의 잔재와 근대화 요소를 정확히 분리해 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제국주의 잔재를 얼마나 정확히 청산해내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는지에 따라 과거사 청산이 평가되어야 한다. 일본 패망 이후 대한제국이 부활하지 않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 자체가 해방 이후 식민지 청산이 완벽하게 되었다는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증거이다. 흔히 대한민국을 기회주의자와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로 폄훼하면서 미완의 ‘친일 청산’을 부르짖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기회주의자의 득세와 친일파 단죄를 외치는 것이 사실은 인적청산에 국한된 것임을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인적청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적청산이다. 미완의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일본 민간인의 재산 몰수는 모르는 체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귀속재산 불하의 공정성만 언급한다.

미군정청은 총독부가 보유하고 있던 대규모 토지를 농민들에게 불하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지주들이 보유하던 2,780㎢의 토지를 1948년 초에 농민에게 매각하여 남한 전체 농가의 약 24%에 해당되는 약 58만여 가구가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이 되었다. 이러한 미군정청의 일본인 농지몰수와 농지매각은 무상몰수, 유상배분이었고, 농지매각 대금에 대한 권리는 미군정청과의 귀속재산 양여협정에 따라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되어 정부재원의 바탕이 되었다. 미군정청의 이러한 조치는 조선반도 수 천 년의 역사에서 처음 있었던 혁명적 조치로서 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수립의 토대가 되었다.

미군정청은 대한민국 건국 후 모든 귀속재산을 대한민국 정부에 양여했는데, 이 양여된 재산은 정부재산의 90%가 넘었다. 이로써 일본은 패망 후 신생 대한민국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식민지 과거사 청산이 이뤄진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세 이상의 남녀 평등선거에 따라 구성된 의회가 제정한 헌법에 의해 건국되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서구화된 국민주권국가를 수립한 민주주의 혁명이자 제국주의의 종언을 상징하는 세계사적인 일대 사건이다.

5. 대한민국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식민지 청산을 마무리했다.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 12. 12. UN 총회는 결의안 제195(Ⅲ)호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했다. 일본도 1952. 4. 28.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발효되어 주권을 회복했다.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a)는 ‘일본국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에는 미군정청이 몰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양여한 민간인 적산재산을 포함된 것이다.

한편 한일기본조약에는 1910년 한일합방 조약을 무효화하고, UN총회 결의 제195(Ⅲ)호에서 명시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기본조약의 부속협정으로 ‘한일문화재및문화협력에관한협정’,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법적지위와대우에관한협정’, ‘한일재산및청구권문제해결과경제협력에관한협정(청구권협정)’이 같은 날 동시에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체결로 해방직후 무국적자로 전락한 일본 거주 한국인들의 영주권이 보장되었으며, 부속협정에서 독도문제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회피함으로써 독도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실효적 지배도 일본에 의해 사실상 승인되었다. 한일기본조약은 일본의 항복선언에도 없던 한일병합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호혜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일본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일본이 국제조약으로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향후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려면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 것은 대한민국에 의한 주도적 통일을 일본이 국제조약으로서 확약했다는 큰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한일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인 청구권협정에는 귀속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이 삽입되었는데 이로써 귀속재산을 양여받은 대한민국이 일본인 민간인에 대한 법적책임이 면책되었다.

이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참가하여 평화와 번영을 공동으로 누리기로 한 독립된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이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후 대한민국은 개방경제체제를 유지하며 고도성장을 달성하였고 기아와 질병의 대물림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점에서 야당과 대학생들의 극심한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견디며 성사시킨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야말로 제국주의 잔재 청산의 완결판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제2조(정의)는 ‘민주화운동이란 1964년 3월 24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ㆍ신장시킨 활동을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위 법률에서 말하는 1964년 3월 24일은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대규모로 촉발된 날이고 보면 ‘민주화운동’의 사상적 바탕은 결국 한일회담 반대의 신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법률로 개념 정의까지 마친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사실은 ‘기억을 다루는 정치’의 결과물이거나 ‘만들어진 집단기억’에 불과하다.

6. 한일기본조약을 흔드는 징용공 배상문제

2018년 대법원이 구 일본제철의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기업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위자료 지급을 명하는 판결을 선고하고, 이 판결에 기해 강제집행이 개시되자 한일기본조약의 효력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일본법인 소유의 국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개시는 한일청구권협정의 효력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문제 제기이자, 국가의 ‘국제조약 준수 의무의 회피’라는 중대한 국제법적 문제를 야기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흔들린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전제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법부의 강제집행은 청구권협정의 효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국제법상 국가 성립요건은 첫째, 국제법을 준수할 의사나 능력이 있을 것, 둘째, 상대방 국가로부터 국가로서 승인받을 것, 이 두가지다. 국가가 독립을 유지하고 국가로서 유지되려면 국제조약을 기꺼이 체결하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일본과 수교함으로써 상호 독립국가로 승인하고 대등한 무역관계를 통해 번영을 누려 왔다. 이 번영의 비밀은 바로 국제조약을 준수하려는 한일 양국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였고, 국내의 일본기업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문제를 수수방관하여 일본으로부터 ‘국가도 아니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국제법 준수 의지를 보여주고 있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7. 인적청산에 집착하는 21세기 대한민국

해방후 70여 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식민지 청산이 계속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자들에게 친일파 청산이 최대 관심사인 이유는 뭘까? 정치인들에게 과거청산은 본질적으로 ‘기억 만들기’ 혹은 ‘기억을 만드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과거청산은 항상 균형감각을 잃은 독선, 그리고 피아식별, 선악이라는 이분법의 잣대가 적용될 뿐이다.

‘제국주의 국가’ 대 ‘피지배 국가’ 간의 식민지배 청산문제는 미군정청의 일본 민간인 사유재산 몰수와 이를 대한민국에 양여한 사건과 한일기본조약체결(한일합방조약 무효 선언,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 국교 수립)로 마무리가 되었다. 제국주의 일본 자체의 청산은 일본의 평화헌법과 미국과의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인한 일본의 독립으로 달성되었다.

식민 지배과정을 거쳐 민족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 내부의 청산문제는 해방 직후부터 인적청산에 주안점을 두고 다뤄졌고 한동안 잊혀졌다가 1987년 이후 친일인명사전이 등장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성장의 불평등마저 초래했다는 인식이 586세대를 주류로 하는 장년층에 팽배해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고 건국한 대한민국은 완벽한 친일청산의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미완의 친일청산’이라는 세뇌작업은 성공한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과거사 청산이나 친일청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제기로 귀착되는 기인한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전환기의 정의를 세운다는 명분 하에 이뤄진 과거사 청산이 전환기를 거치면서 새로 수립된 정부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마치 면역체계가 자기 신체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현상에 다름이 아니다.

미군정청에 의한 조선총독부 재산과 일본인 기업 재산에 대한 몰수와 귀속, 그 귀속재산의 대한민국 정부로 양여된 조치, 그 귀속재산의 민간불하 등에 대해서는 친일청산의 문제로 다루려는 시도나 연구는 고사하고 지식인들에게 어떤 인식조차 된 바 없었다. 일본제국주의 잔재라고 해서 일본이 남겨주고 간 모든 것을 청산해야 한다면 그것은 120년 전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국주의로 치닫기 이전의 일본과 대한제국 합방의 동시대적 의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대한제국의 외피를 쓰고 일본국과 합방됨으로써 봉건의 잔재를 그대로 남기게 되었고, 그 상태로 해방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대한민국은 조선시대의 봉건사회 특질을 그대로 보유한 채 건국되었다.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은 민족주의 외피를 쓴 사회주의자에 맞서 토지개혁과 ‘개인’의 창조에 앞장서면서 조선시대의 봉건잔재들을 성공적으로 청산해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적청산에 집착한 나머지 친일파에 대한 청산작업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근대국가의 기본인 법치주의에 반한다. 현재 벌어지는 친일파 청산은 과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정적에 대해 친일파의 후손으로 지목하기, 친일파의 후손에 대한 재산 박탈과 사실상의 공무담임권의 제약, 과거 역사에 대한 비평, 민족주의 정서에 반하는 정치인의 언동에 대한 징치 등의 모습으로 점차 광기를 띄어 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개인소유권의 절대적 보호와 소급입법 금지 및 법적안정성이 모두 파괴됨으로써 과거로 가는 블랙홀이 활짝 열린 국가가 되고 있다.

친일청산이 조선총독부 시절을 단죄하는 것이라면, 21세기 들어서 각종 과거사 위원회가 만들어내는 집단기억들은 대한민국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단기억의 밑그림에는 대한민국은 친일파와 같은 외세에 기생하는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나라이고, 그 기회주의 기득권자들이 민중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에 민중들이 각성하여 외세와 압제의 쇠사슬을 끊어내야 한다는 당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집단기억을 만들어 내기 딱 좋은 것이 인적청산 중심의 친일청산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친일인명사전 작업으로 표출되었다.

전환기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바로 새로 건국될 국가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 청산과 관련된 전쟁범죄에 관여한 것이 아니라면 딱히 청산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구체제의 잔재를 청산하려면 일제하에서 존속하고 있던 봉건잔재부터 청산했어야 한다.

8. 과거사 청산이라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자

‘강박증’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특정한 사고나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대한민국은 건국된 지 7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청산’이라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분으로 ‘과거’를 정치적으로 해석해 ‘집단기억’으로 만드는 작업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소위 ‘민주화’ 시대와 발맞추어 발족된 각종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각종 특별법에 암묵적으로 담겨진 정치적 목적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에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보다는 ‘있어야 할 당위로서의 과거’에 치중하여 활동하였다. 그래서 역사적 진실보다는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분하고 찾아내는 일에 더 매진했다. 또한 각종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은 대부분 금전적 보상과도 관련되었다. 그러나 그런 금전적 보상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사실상 의문이다. 지난 수 십년간 지속되어온 국가적 차원의 ‘과거사 바로세우기’도 바로 ‘미완의 친일청산’이라는 관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미래 세대들에게 과거의 아픔을 현재에 재현하여 정신적 외상을 가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과거사청산은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되어야지 과거의 아픔을 재현하여 그 과거의 기억을 새로운 세대에게 주입함으로써 분노와 저주의 감정을 가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최근 민노총 거제지부는 거제도에 징용동상을 설치한다고 선포했다. 전국에 걸쳐 세워지는 반일동상들은 반일프레임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공격하려는 과거청산의 탈을 쓴 정치극으로 국민통합과 한일 안보협력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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