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이 국군의 날을 변경하려 했던 진짜 이유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 와중에 흥미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 모든 소동의 출발점이 전직 대통령 문재인이며, 자유시참변 당시 한국 독립군 몰살과 관련하여 홍범도는 하수인 정도에 불과하고, 이동휘가 그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문재인은 대통령 임기 첫해인 2017년 8월, 국방부 첫 업무보고에서 국방부장관에게 “광복군,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전통을 육사 교육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군(軍) 역사에 편입시켜라”, “10월 1일인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바꾸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두 가지를 지시했다. 보고에는 임종석 당시 비서실장과 장하성 정책실장 등이 배석했다고 한다(중앙일보, 「김원봉 막히자 홍범도…文정부 목표는 ‘軍 뿌리’ 바꾸기」, 2023년 8월 31일).

이후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국회에 ‘국군의 날 변경 결의안’을 제출했으며(2017년 9월), 국방부는 국군의 역사적 뿌리를 독립군·광복군으로 돌리는 역사 날조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육사 교정에 홍범도를 비롯한 이범석·김좌진·지청천·이회영 등 5인의 독립운동가 흉상이 설치된 것은 그로부터 7개월 후인 2018년 3월이었다. 오성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의 증언에 의하면 흉상 설치작업은 당시 육사 교장 김완태 주도하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됐다(조선일보, 「文의 육사 임관식 참석에 맞춰 교장이 서둘러 홍범도 동상 설치」, 2023년 9월 22일). 문제의 흉상 설치에 대해 당시 대통령 문재인은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이어 문재인은 현충일 기념사에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문재인의 발언이 제기되자 우파 시민사회에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국군의 뿌리가 아니라 인민군 남침의 선봉이었으며, 김원봉은 월북하여 북한 정권 창설 및 6·25 남침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6·25 남침의 선봉대를 국군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망언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문재인은 재빨리 김원봉 카드를 폐기하고 홍범도를 대타로 내세웠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문재인이 느닷없이 자유시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섰던 홍범도를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붕붕 띄우고, 국군의 날을 10월 1일에서 광복군 창건일로 바꾸려 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 홍범도를 붕붕 띄운 이유는 독립운동가 선양이 목적이 아니라,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는 국군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10월 1일은 6·25 당시 우리 국군이 38선을 돌파, 북진을 개시하여 북한 해방의 첫 발을 내딛은 역사적인 날(1950)인 동시에, 한미 동맹의 근간인 한미상호방위조약 정식 체결일(1953)이었다. 북한이나 그들을 추종하는 친북좌익, 공산주의 추종세력 입장에서 볼 때 10월 1일이야말로 치 떨리는 일이 벌어진 고약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김원봉과 홍범도를 열심히 부각시킨 진짜 이유는 ‘독립군 지도자 선양’이 아니라, 사실은 한미 동맹에 근간을 둔 국군 역사를 부정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 공작이었다. 국수적 민족주의, 이른바 쇼비니즘(chauvinisme)의 세례를 받은 좌익 정치가, 그들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국사학자와 들의 농간에 눈멀고 귀멀어 역사적 알츠하이머 상태에 빠진 불쌍한 한국인들만 그런 사실을 긴가민가 하며 아웅다웅하고 있다.

#. 코민테른의 사생아 이동휘

이동휘는 함경도 단천군 출신으로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강화 진위대 참령을 지냈으며,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유배되었다. 1912년 유배지를 탈출,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대단한 독립운동가로 추앙받아 마땅한 애국지사였다.

그런데, 러시아 정부가 일본 정부의 공작에 속아 이동휘를 독일 간첩 혐의로 체포하여 알렉세예프스크(자유시) 감옥에 수감하면서 그는 열혈 공산주의자로 돌변, 코민테른 사생아의 길을 걷게 된다. 얼마 후 자유시참변의 현장이 될 알렉세예프 감옥에서 이동휘는 볼셰비키의 인도로 공산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김방, 『이동휘 연구』, 국학자료원, 2015, 131쪽).

그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은 한국계 여성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의 지원으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고,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상해파 고려공산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적기(赤旗)와 사회주의 혁명을 신봉한 이동휘는 모든 계급을 타파하고 토지와 생산시설의 국유화를 표방했다.

이동휘가 조직한 정당 이름은 한인사회당이었지만, 공산사회 실현을 목표로 삼았고, 코민테른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던 사실은 임정 경무국장 김구의 『백범일지』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동휘: “혁명이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다. 이대로 독립하면 또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 두 번 피를 흘리는 것은 우리 민족의 대불행 아닌가. 그러니 같이 공산주의를 하자.”

김구: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 코민테른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아도 가능한가.”

이동휘: “안 되지요.”

김구: “우리 독립운동이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행위다.”

이동휘는 박진순을 모스크바에 파견,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및 레닌 정부와 굳건한 협력기반을 갖췄다. 오른쪽 세 번째가 박진순, 그 옆의 인물이 레닌이다. 

#. 한국 독립군을 레닌 정부에 팔아넘기는 비밀조약 체결한 이동휘

이동휘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300만 루블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거액을 지원받고 볼셰비키 정부(이하 레닌 정부로 호칭)와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으로 알려진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신효승, 「20세 기초 국제정세 변동과 한인 무장 독립운동」, 연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8, 188쪽).

첫째, 대한민국은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찬성하고, 노농(勞農) 정부는 모름지기 한국을 원조하고, 이 주의를 세계에 선전할 것.

둘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하나의 독립군대를 설치하여 시베리아 지방에 주둔하고, 러시아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을 것.

레닌 정부가 코민테른을 통해 이동휘 일파에게 거액을 제공한 이유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공산화하고, 한국인 무장 부대를 적군 산하로 편입시켜 레닌 정부의 지휘하에 두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고, 그들을 앞세워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군을 자유시로 유인토록 했다. 자유시참변의 주범은 누가 뭐래도 이동휘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국수적 민족주의에 빠진 국사학자들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미화해놓은 이동휘. 그는 한 시절 독립투사였지만, 공산주의자가 된 후엔 레닌 정부와 비밀 협약을 맺고 한국독립군을 자유시로 유인하여 몰살시키는 몸통 역할을 했다.
국수적 민족주의에 빠진 국사학자들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미화해놓은 이동휘. 그는 한 시절 독립투사였지만, 공산주의자가 된 후엔 레닌 정부와 비밀 협약을 맺고 한국독립군을 자유시로 유인하여 몰살시키는 몸통 역할을 했다.

#. 이동휘는 코민테른을 자금 어디에 썼나?

한국 독립운동사 최대의 흑역사는 자유시참변이고, 두 번째 흑역사는 코민테른 자금의 행방이다. 이동휘 일파는 레닌 정부로부터 거액을 받고 한국 독립군을 지유시로 유인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이동휘는 한국 독립군 3,500명을 레닌 정부에 팔아넘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동휘는 한국 독립군을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코민테른 자금’을 어디에 사용했을까?

제1차 코민테른 자금은 1920년 3월 24일, 제정러시아 화폐 400만 루블이 이동휘 일파에게 제공되었다. 이 자금은 운반 도중 레닌 정부의 괴뢰국인 극동공화국에 200만 루블을 몰수당하고, 상해에는 200만 루블만 전달되었다. 상해에서 이 돈을 환전하니 약 10만 엔이 되었다. 이동휘는 이 돈의 거의 전부를 공산주의 진영 강화를 위한 ‘혁명 활동’에 집행했다고 밝혔다.

1차 코민테른 지원금 사용내역

내역

금액

인쇄기 구입비

4,000

잡지 <공산주의자>, 팜플렛 1만 부, 해외 문헌 번역, 출판물 발송비

1,600

일본 사회주의 지도자들과의 연락과 상해에서 한인 사회주의자의 일본 출장비, 상해 한인 사회주의기관원에서 혁명 사업을 위해 본국 출장비 및 한국 내 여러 혁명단체에 송금 등

20,000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5,000

상하이, 베이징, 남만주와 북만주의 혁명 조직사업비

20,000

중국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당 사업비

20,000

출처: 박종효, 러시아 연방의 고려인 역사, 도서출판 선인, 2018, 274.

제2차 코민테른 자금은 국제통용 화폐인 금화 100만 루블(약 100만 달러)이 제공되었다. 1차로 40만 루블을 수령했는데, 워낙 거액이어서 박진순(22만 루블), 김립(12만 루블), 한형권(6만 루블)이 자금을 분산하여 상해로 운반했다.

김립은 자신이 담당한 12만 루블 중 4만 루블을 몽골의 우르가에서 만난 통신원 이태무에게 상해 한인사회당 중앙위에 전달하라고 인계했다. 이태무는 4만 루블을 강도에게 빼앗기고 살해당하는 바람에 김립은 8만 루블만 운반에 성공했다. 박진순이 담당한 22만 루블은 이동휘의 지시로 3만 루블을 치타에서 사회주의 동지 박애·계봉우에게 떼어주고 19만 루블만 상해에 도착했다.

이동휘는 코민테른 자금을 자기 휘하 공산주의자들에게만 분배하면서 문제가 폭발했다. 박진순은 운반해 온 자금의 일부를 베이징에 있는 러시아인 아내에게 맡겼으며, 김립은 돈의 일부를 횡령하여 북간도에 농장을 마련하고 상해로 와서는 중국인 첩과 호화로운 주택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김구,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1971, 280~281쪽).

김홍일의 증언에 의하면 코민테른 자금이 상해 바닥에 풀리자 그곳 젊은 사람치고 다소나마 그 돈을 안 써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돈 문제를 둘러싼 추문이 결국 독립운동 분열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108~109쪽).

당시 상해 임정은 청사 임대료 30원, 직원 월급이 20원이 채 안 되었지만 돈이 없어 밥먹듯이 임대료를 체납했다. 워낙 사정이 어렵자 임정을 배신하고 일본인 첩자 노릇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임병직, 『임정에서 인도까지』, 여원사, 1964, 179쪽). 이 와중에 이동휘가 거액의 자금을 임정에 한 푼도 내놓지 않고 흥청망청 사용하자 임정 지도부가 발칵 뒤집혔다.

이동휘는 1921년 3월부터 1922년 5월 26일까지 사용한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의 지출 내역을 레닌 정부에 보고했는데, 그 내역이 참으로 충격적이다.

①금 11만 2,000원(루블) : 전 한인사회당에 책임 있는 문부(증빙)가 없어 내역 불가능.

②금 6만 원(루블) : 이에 대해 책임은 한형권에 있고 본인은 없어서 내역 불가능.

③금 4만 8,000원(루블) : 몽고 미풍양행 천진지점의 손으로 송금할 시 금 12만 원에 대한 손금.

④금 15만 원 : 조선공산당 성립 후 그 본부에 인도.

코민테른이 지원한 금화 40만 루블 중 55%에 해당하는 22만 루블은 누가, 어디에 썼는지 내역조차 밝히지 못했고, 15만 루블만 고려공산당에 인계했다고 실토했다. 그들의 자금 횡령 의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일부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코민테른이 40만 루블만 제공했고, 나머지 60만 루블은 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박종효는 한형권이 금화 60만 루블을 더 수령한 사실을 러시아 문서를 통해 밝혀냈다(박종효, 앞의 책, 290쪽). 따라서 코민테른이 이동휘 일파에게 제공한 제2차 자금 총액은 금화 100만 루블이다. 그렇다면 후에 받아낸 60만 루블은 어디로 갔을까? 이동휘 일파가 어디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아무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동휘 측이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을 불투명하게 지출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자 임정은 코민테른 자금 운송책 한형권·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렸다. 1922년 2월 1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자베이(閘北)거리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임정 경무국장 김구가 보낸 자객 오면직·노종균이 김립을 쏴 죽이는 분노의 총성이었다.

#. 자금 지원 대가로 한국 독립군 자유시로 유인한 이동휘

코민테른 자금을 수령한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레닌 정부와 체결한 비밀 협약에 따라 일관되고 집요하게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을 진행했다(박종효, 『러시아 연방의 고려인 역사』, 도서출판 선인, 2018, 290~291쪽). 이동휘는 태극기를 폐지하고 푸른 천에 세 개의 붉은 별이 있는 국기로 바꾸자고 주장했다(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 지음, 이준형 옮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역사비평사, 1990, 106쪽). 또 임정을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시베리아로 옮기려 했다.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이 실패하자 이동휘는 레닌 정부와 약속한 대로 간도·연해주의 한국인 무장부대를 시베리아 영내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간도·연해주 무장부대에 “항일 활동의 자유가 보장된 극동공화국(레닌 정부의 괴뢰국) 영내의 해방된 자유시로 집결하라. 모두 모여 단일 지도부를 구성하면 소비에트 정부가 무기와 보급을 책임진다”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동휘는 긴급구호금 2만 원을 지원하여 간도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이동을 열심히 부추겼다(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1권,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253쪽 참조).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유인된 한국독립군은 적군 산하로의 편입에 찬성하는 파와 반대파로 갈렸다. 반대파가 적군 편입을 거부하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적군을 비롯하여, 그들 편에선 홍범도·지청천·안무·최진동 등 한국독립군은 자신들의 동료였던 반대파 1,700여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아 해산시켜 버렸다.

적군 산하로의 편입에 찬성했던 홍범도 이하 한국 독립군 1800여 명의 운명도 비참했다. 그들은 고려혁명군으로 편제되어 이르쿠츠크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적군 산하로 편입되어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일본은 시베리아에 파병된 일본군 철수 조건의 하나로 러시아령에서 활동하는 한국 빨치산 부대의 해체를 요구했다. 레닌 정부는 이에 동의했다. 레닌 정부가 1922년 9월 고려혁명군을 해산시킨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동휘에게 속아 자유시로 들어간 한국 독립군 3,500명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러시아로부터 버림받은 한국 빨치산들이 겨울을 맞아 각지에서 걸인같이 방황하는 모습을 목격한 김경천(진짜 김일성으로 평가받는 인물)은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영하 사십도 시베리아 추위에/ 여름 모자 쓰고서 홋저고리로/ 밑 빠진 메거리(짚신)에 간발하고서/ 벌벌 떨고 다니는 우리 독립군’(김경천 지음, 김병학 역, 『경천아일록』, 학고방, 2012, 216쪽)

#. 자유시참변 이후 이동휘의 행적

자유시참변 이후 한국 독립군이 비참하게 해산당해 시베리아를 유령처럼 떠돌 때, 이동휘는 사상의 고향 러시아에 정착했다. 1923년 이동휘는 코민테른 꼬르뷰로(Korbureau·고려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백군과 처절한 내전으로 허약해지고 열강에 포위된 소련은 동아시아의 강적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1924년 2월 꼬르뷰로를 해산하고 오르그뷰로(組織局)를 설치했다. 갈곳이 없어진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고려도서관장으로 일했다.

1925년 1월 소련은 일본과 러일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상대 국가의 치안을 해치는 행동을 금지하기로 약속했다. 이로써 소련령에서 일본에 적대하는 한국 독립군의 모든 활동을 금지시켰고, 오르그뷰로마저 해체했다.

이동휘는 1930년부터 국제혁명가후원회(MOPR) 원동 지역 한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모플은 공산혁명 과정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돕는 단체다. 박헌영이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모플의 지원 덕분이었다.

1935년 1월 31일 이동휘는 모플의 모금을 위해 연해주 수청 지방을 방문하던 중 독감으로 쓰러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 이동휘는 스탈린의 광기 어린 20만 한인의 중앙아시아 대이주라는 참극을 체험하기 전에 천수를 다했으니 그나마 행복한 편에 속한다.

그는 죽기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 유언을 남긴 이동휘에게 김영삼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다. 과연 한국 독립군을 레닌 정부에 팔아넘긴 이동휘에게 건국훈장 추서는 정당했는가? 냉정한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때가 왔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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