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전남 보성의 한 도로에서 70대 운전자가 몰던 승용차가 버스 정류장을 덮쳐 여고생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운전자 A씨(78)와 동승자도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급발진 사고로 인한 사망과 부상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최근 급발진 사고로 인한 사망과 부상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차량이 버스정류장 방향으로 돌진했다”며 급발진을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차량 분석을 요청하는 등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급발진 의심 사고 연간 400건, 인정받기는 하늘의 별따기

최근 자동차가 고도로 전자화, 전기화되면서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운전하기가 두렵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급발진 의심 사고가 나더라도 ‘급발진’으로 인정받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급발진 현상을 신고한 건수는 196건인데, 결함 인정은 ‘0’건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실제 사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C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급발진연구회·교통사고 전문변호사 등에 도움을 요청해 오는 비공식 사례를 보면 더 많을 것”이라며 “연간 400건, 하루 1건 이상 급발진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고 본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국토부의 자료에 따른 신고 건수는 5년간 196건인 반면, 김 교수는 연간 400건으로 추정했다. 5년간 2000건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국토부의 신고 건수는 실제 발생 사례의 10분의 1에 불과한 셈이다.

이처럼 급발진 신고 건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김 교수는 “한국 운전자들은 한국에선 법적으로 (급발진을 인정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고를 안 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운전자가 자동차 결함을 찾아야 되기 때문에 제조사 입장에서는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소비자가) 알아서 져주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는 ‘제조업체가 결함이 없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고, 입증을 못 하면 운전자와 합의’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제작사가 (급발진 사고가 나지 않도록) 열심히 만든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손자 숨진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제조사에 유리한 판정 시스템에 대한 비판 여론 고조시켜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선처 탄원서. [연합뉴스 자료사진]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선처 탄원서.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제조사가 가만히 누워있을 수만은 없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12월 6일 강릉시 홍제동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사고를 계기로 자동차 제조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현행 급발진 판정 시스템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족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다.

해당 사건은 할머니인 A씨가 손자 이도현(사망 당시 12세)군을 태우고 운전하던 중 A씨의 차량이 돌연 굉음과 연기를 내며 가속하기 시작했고, 신호 대기 중이던 앞차를 들이받으며 발생했다. 그러고도 600m를 더 달리다 왕복 4차로 도로를 넘어간 뒤 지하 통로에 추락했다.

강릉 급발진 사고 발생 장면. 굉음과 연기를 내며 가속하기 시작한 운전자 A씨의 차량이 4차선 도로를 넘어가는 모습. 이 사고로 A씨의 손자는 사망했고, A씨는 입견돼 조사를 받다가 지난달 17일 혐의 없음으로 불송치됐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강릉 급발진 사고 발생 장면. 굉음과 연기를 내며 가속하기 시작한 운전자 A씨의 차량이 4차선 도로를 넘어가는 모습. 이 사고로 A씨의 손자는 사망했고, A씨는 입견돼 조사를 받다가 지난달 17일 혐의 없음으로 불송치됐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이 사고로 A씨는 크게 다쳤고, 도현군은 숨졌다.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는 A씨가 “아이고, 이게 왜 안돼. 큰일났다”고 당황하는 음성이 담겼다. 이내 사고를 직감한 듯 A씨가 도현군의 이름을 안타깝게 부르는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경찰은 운전자였던 할머니 A씨에 대해 교통사고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해 조사를 했다. 이후 A씨의 사연과 급발진 의심 정황이 담긴 영상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하면서 A씨를 옹호하는 여론이 형성됐다.

국과수는 ‘급가속’ 판단...경찰은 이례적으로 국과수 감정 결과 배제하고 ‘불송치’ 결정

그리고 10개월 만인 지난달 17일, 경찰은 A씨 혐의가 없다고 보고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이례적으로 채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과수는 감정 결과에서 차량 사고기록장치(EDR)에 저장된 마지막 5초의 기록이 가속 페달을 100% 모두 밟은 것으로 저장되어 있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 같은 데이터 감식 결과가 차량의 기계적 오류가 없었다는 결과로 이어지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실제 엔진을 구동한 결과가 아니어서 감정의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차량이 급가속하기 시작할 당시 모닝 승용차를 추돌한 상황을 두고 국과수는 '운전자가 변속레버를 굉음 발생 직전에 주행(D)→중립(N), 추돌 직전 중립(N)→주행(D)으로 조작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법원이 선정한 전문감정인의 음향 감정 결과에서는 국과수의 결론과는 다른 분석이 나왔다. 법원 감정인은 사고차량의 블랙박스에 녹음된 음향에서 추돌 전에 변속레버를 주행(D)에서 중립(N)으로, 또 중립(N)에서 주행(D)으로 변경하는 소리가 들리는지 같은 연식의 동일 차종에서 변속할 때 나는 소리와 비교 분석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사진=연합뉴스TV 캡처]

그 결과 감정인은 "사고 당시 상황을 일부 재연한 조건에서 변속레버를 반복 조작하며 채취한 음향 데이터와 사고 차량의 음향 정보는 동일하지 않다"는 감정 결과를 도출하고 이를 법원에 제출했다. '운전자가 추돌 사고 직전에 기어를 바꿔 가속페달을 밟았을 것'이라는 국과수 감정 결과와 상반되는 내용이다.

재판부가 제조사보다 운전자 A씨와 유가족 손을 들어줄 가능성 주목돼

경찰이 A씨를 불송치함에 따라,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채택하지 않는 ‘이변’이 발생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통해 급발진 의심 증거들은 늘고 있지만, 국과수가 차량 결함을 인정한 사례가 전혀 없는 상황에 대해 국과수 감정 결과의 신뢰성을 의심받게 된 것이다.

현재 차량 운전자 A씨와 가족들은 제조사를 상대로 7억6000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를 한 상태이다. 경찰이 ‘불송치’ 판단을 내리면서, 도현이 사건의 국과수 감정 결과는 민사재판에서도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관측되고 있다. A씨가 급가속을 했다는 국과수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경찰의 이례적 결정이 재판부의 판단에 반영된다면 제조사 책임 문제가 부상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지난 5월 첫 변론기일과 6월 감정기일을 진행한 데 이어, 다음 재판은 28일 진행된다. 내년 2월 법관 정기인사 전 1심 선고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재판부가 A씨의 손을 들어줄 경우, 급발진 사고에 대한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첫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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