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연평해전이 벌어진 2002년 6월29일은 한일월드컵 대한민국과 터키의 준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제2차 연평해전은 그보다 3년 앞선 1999년 6월15일 발생한 제1차 연평해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 해군의 기습 복수전이었다. 온 국민,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지키는 해군 장병들까지 월드컵 응원에 정신이 없던 날을 골랐던 것 부터가 그랬다.

그동안 서해 NLL 수역에서의 충돌은 예외없이 북한군 함정이 NLL을 넘어와 우리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발생했다.

이에따라 우리 해군은 북한 함정이 NLL을 넘어오면 우리 해군의 고속정과 초계함이 출동해 1차로 경고통신과 방송, 경고사격을 하고, 그래도 물러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성능이 우수한 우리 고속정이 북한 함정 주위를 맴돌면서 충돌위협을 가하고 실제 충돌까지 해서 물러나게 하는 ‘위협기동’을 하는 작전을 펼쳐왔다.

김정일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던 김대중 정권은 1차 연평해전이 벌어지자 해군으로 하여금 선제 경고사격과 위협기동을 사실상 금지시켜 버렸다.

2000년 6월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북한 해군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은 피해가 거의 없었던 반면, 함정 1척이 격침되고, 다수의 함정이 피격돼 수십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이 고속정 참수리 357호에 바싹 다가와 기습적으로 대구경 함포를 쏘는 바람에 정장인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을 비롯한 6명이 순식간에 전사했다. 해군의 달라진 교전수칙으로 인해 경고사격 등으로 북한 경비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국가보훈부 차관으로 발탁해 큰 화제가 되고있는 이희완 해군대령은 제2차 연평해전 당시 중위, 참수리 357호의 부정장으로 참전했다. 이 차관은 북한군의 기습사격으로 윤영하 정장이 쓰러지자 전투를 지휘하다가 북한군 함포와 기관포탄에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 처참했는지는 전투가 끝나고 한시간쯤 뒤 후송헬기가 날아왔는데, 이희완 중위 스스로 몸에서 떨어져 나간 오른쪽 다리를 주워서 들고 헬기에 탑승했다는 회고를 통해 드러난다.

“헬기가 날아가는 동안 윗칸 침대에 실려있던 전우의 피가 계속 얼굴에 떨어져 연신 닦았지만, 눈에 피가 고여서 처음에는 눈앞의 온세상이 핏빛으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기억하기도 했다.

제2차 연평해전이 있은지 1년쯤 뒤 기자는 해군 관계자를 설득해서 당시 이희완 대위를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판에 국방부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2002년 연말 대선으로 노무현 정권이 출범했는데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의 국방부 또한 이희완 대위가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 진해에 있는 해군 사관학교에서 이희완 대위를 인터뷰했는데, 인터뷰가 보도된 뒤 선우라는 결혼정보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이웅진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이웅진 대표는 “이 대위의 인터뷰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자 중매회사 대표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나라를 지키다가 다리를 잃은 그를 장가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연락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대위한테 물어보고 현재 사귀거나 결혼할 여자친구가 없으면 연락해달라”고 했다.

이웅진 대표를 모르지 않던 터라, “그런데 시집 올 여성이 있을까요?”라고 했더니 “제 목숨, 우리 회사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결혼시키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으로는 회사를 홍보하기 위한 상술(商術)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막상 한쪽 다리를 잃은 초급장교의 결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수천 수만명의 데이터베이스를 가진 결혼정보회사라면 신부감을 찾아줄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었다.

이웅진 대표의 결혼 정보회사가 이희완 대위의 짝으로 찾아준 여성은 월남전 참전 유공자를 아버지로 둔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다. 여기에 이 대위는 경북 김천 출생에 울산에서 학교를 다닌 영남사람인 반면 신부감은 광주에 살고 있었으니 ‘영호남의 결합’이기도 했다.

이웅진 대표는 이희완 대위의 결혼식 비용에 신혼비용까지 부담했다. 기자가 우려했던 바, 언론에 두 사람의 결혼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홍보도 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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