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직접적인 근접적 교섭은, 공교롭게도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문명과 문명 사이의 충돌, 또는 문화지간의 충돌은 늘상 전쟁이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역사다.

문명사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전쟁은 정의냐 불의냐 하는 도덕적 가치기준의 판단에 앞서 이문화 사이의 교섭, 교류의 큰 팩터로서 역사의 큰 주제이기도 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근대 중국(청국)과 일본은 대규모적인 지근거리의 접촉이 바로 1894년의 청일전쟁이다.

전쟁의 이유는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조선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청국의 쟁탈전이 그 내막의 본질이다. 이렇게 대륙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운 민족은 역사상 늘 양측에서 습격해오는 분쟁과 문명의 바람을 다 맞아야하는 운명은 어쩔 수 없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본과 청국의 뒤에는 또 러시아가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세계의 지정학자들은 이를 통틀어 "지정학적인 숙명"으로 조선같은 운명을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최근 '지정학'은 서양중심적인 학설이라고 비판의 화살을 맞기도 하지만 영국의 지리학자 맥킨더가 1904년에 창시한 이 학설은 관념론이나 숙명론으로 일축할 수 없는 정책과학의 하나다. 지정학은 지구 전체를 늘 하나의 단위로 보며 그 동향을 리얼타임으로 포착해 거기서 현재의 정책에 필요한 제안을 하는 학문이다.

아무튼 타자에 의해 칼도마에 오르는 타율적인 위치에서 우왕좌왕하는 조선의 그것은 바로 '비운'이란 낱말이 늘 뒤따르게 된다.

129세기 말 메이지 정부가 조선에 대한 기본 정책은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국교를 맺는 것을 바랐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또한 지금껏 종주국으로서 군림해 왔던 청국의 권한을 공연히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리하여 일본은 메이지 9년 즉 1876년 강화도조약(일조양국수호조약) 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청국과 대립해왔다. 1890년 제1회 제국회의에서 당시의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반도의 이익을 확보키로 결정하였다. 그뒤 동학운동이 발발, 조선정부가 청국에 농민봉기를 탄압하기 위한 원병을 요망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점진파들의 신중론을 누르고 난 정부 급진파들은 대부대의 육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청국과 조선에 있어서의 권력의 발란스를 노렸다.

청일 양국의 파병으로 동학당 봉기는 진압했지만 양국의 군대는 철수하지 않은 채로 주둔을 견지했다. 일본은 청국을 격퇴할 전쟁계획을 획책하고 7월 25일 아침 풍도에서 북양함대 일부대를 습격했다. 4일 후 경성의 남부에 포진한 청군과 싸웠다.

결과적으로 해전, 육전에서 청국군은 대패배, 일본은 첫 근대전쟁의 대승을 거둔다. 중국측의 전쟁에 대한 기술은 이미 교과서 등을 통해 알 수 있으므로 여기서 구구한 서술은 약하기로 하고 일본측의 전쟁양상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일본측의 문헌자료들을 점검하면서 놀라운 일은 청국은 일본과 싸운 일도 모르는 민중이 많을 정도로 무관심했지만 당시 일본은 거국일치로 전쟁을 찬성하고 응원의 파도가 파죽지세로 팽배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유명 지식인인 도쿠도미소호(이광수의 스승), 미야케 세츠레이는 물론 코스모폴리탄 사상가로서 저명한 우치무라 간조와 같은 지식인까지도 '대표적인 일본인' 등 저술을 통해 청일전쟁이 명예로운 의전이라고 예찬했다. 그 유명한 메이지 계몽가 일만엔 지폐에 오른 후쿠자와 유키치는 즉각 1만엔을 기부한다. 현재시가로 환산하면 1억엔 어치의 거액이다.

더구나 일본은 당시의 모든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스컴을 총동원하였다. 현장 종군기자, 화가, 작가를 파견하여 일단위로 전쟁을 보도했다. 당시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아시아 최대 대국인 청국을 두려워했으며 북양군벌 이홍장과 또 그 이상으로 남방의 세력의 최대권력자 장지동을 경계했으나 장지동은 대만의 화재를 구경하듯 구경만으로 수수방관했다. 청국의 국가관념과 함께 애국의식은 박약했던 것이 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전쟁에 있어 누구나가 '당사자'의 자세로 임했다. 온 국민이 전쟁에 열광하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전쟁의 체험자였다. 많은 대중들은 앞다퉈 의연금을 기부하고 돈 없는 젊은이들은 종군지원에 나섰다. 일본 신문에는 전쟁의 영웅 미담과 함께 의연금 기부, 전쟁을 계기로 나라에 봉사하는 국민의 미담도 지면을 메웠다. 청일전쟁이란 콘텐츠는 독자를 열광시키고 신문 잡지에 의한 세계인식하는 습관을 온 일본사에 정착시켰다. 신문매체의 힘은 이렇게 파워가 크며 동일가치관으로 내모는 위험성도 구비하고 있으면서, 이런 배경 아래서 대중사회가 이루어졌다.

100여년 전의 일본과 청국이 조선의 이익을 위해 벌인 전쟁에서 이런 재발견을 할 수 있다.

전례 없는 근대전쟁으로 그것은 중국에게는 당시 국민의 부재와 국민국가의 미완성, 국가의식의 결여성을 노정했으며, 일본에게는 전 사회의 극변을 가져오며 전례없는 '국민'이란 의식과 함께 국민을 탄생시키고 진정으로 탈바꿈을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적 질서를 전례없이 동요시켰으며, 동아시아에 군림하던 청국이 제국적인 리드체계가 하루아침에 실추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귀추하면 일본 같은 '국민국가'의 일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그것이다.

우리가 '근대'라고 칭할 수 있는 근대는 사실 청일전쟁을 경계선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전근대와 근대의 분수령이다.

1895년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에 의해 체결된 '마관조약'에서 청국은 조선 종주국에서 이탈하고 대만을 할거당함으로써 '반식민지대륙'으로 낙인된다. 청국에 대해서는 막대한 치욕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일본이 청국 대신 동아시아의 소위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청국 수하에서 앗은 조선을 독립시키기에 이른다.

청국과의 싸움에서 형성된 국민국가적 공동체 의식을 청국은 또 거기서 배우게 되고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국은 멸망, 손문에 의해 새로운 국민국가적 공화국이 성립되게 된다.

조선은 일본의 승전에 의해 수백년 중국의 '속국'에서 해방되어 최초로 '독립'을 이루게 된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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