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김석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조선을 서양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은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스페르베르 호가 1653년 대만의 가오슝(高雄)에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항행하던 도중 태풍을 만나 난파하여 제주도 서남해안 모슬포에 표착하였다. 하멜 일행은 13년간 고생하다가 탈출에 성공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동안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조선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바로 하멜 표류기다.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하고, 1522년에는 마젤란 함대가 세계일주에 성공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후 동아시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함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 봉건 시대 영주들은 이웃 번(藩)과의 싸움을 위해 최신무기를 구하려 했다. 야심이 컸던 오다 노부나가가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구입하여 전국 통일을 추구하였다. 그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1598년 사망하였다. 결국 도쿠가와 이예야스가 통일을 이루어 1603년 에도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는 통신사 교환을 이어갔지만, 기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취했다. 다만,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허용하여 유일한 대외 창구로 삼았다. 이 상관에 네덜란드인들이 머물면서 서양 문물을 들여오는 안내 역할을 하였고, 에도 막부에 서양 사정을 설명하는 체제를 유지하였다. 에도막부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약탈적 성향에 반해 평화적 거래를 추구하는 네덜란드를 선호하였다. 그렇게 네덜란드를 통해서 서양의 문명이 일본에 들어왔기에 서양의 학문을 난학(蘭學)이라고 불렀다.

  네덜란드는 독일 북부의 늪지대를 간척하여 세운 나라다. 전 국토의 1/3이 해수면보다 낮다. 낮은 지역의 물을 퍼내기 위한 노력이 댐과 운하와 풍차의 나라로 만들었다. 2002년 축구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르게 한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출신이다. 

  네덜란드인들은 근면하게 부를 축적한 다음 종주국이던 스페인 왕조에 대한 80년 독립전쟁을 거쳐 1648년 베스트팔렌 체제에서 독립을 인정받았다. 평화(Peace), 번영(Prosperity), 실용주의(Pragmatism)의 3P 정신을 추구해온 네덜란드는 독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진국 대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동아시아의 적도지방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구로시오(黑潮) 해류가 규슈에 부딪히기에 서양의 함선은 자연스럽게 일본에 쉽게 도착하였다. 반(半)폐쇄해의 안쪽에 있는 조선반도는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한 대륙 중국만 바라보던 조선 엘리트들도 해양으로부터의 외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조정은 모반세력의 등장을 우려하여 공도(空島)정책을 취하여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뱃사람을 천인 취급하였다. 그러니 서양의 넓은 세계가 보일 리 없었다. 

  ‘백 번 듣기보다는 한번 보는 게 낫다(百聞 不如一見)’라고 했다.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였고, 바깥세상을 알 턱이 없었다. 1800년대 일본에서 서양학문을 강의했던 미국인 목사 그리피스(W. E. Griffis)가 1882년 “코레아,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을 출판하여 소개하였다.

  그런 은자의 나라가 지금 어찌 되었는가? 찰스 프리드먼(Charles Friedman)은 “100년 후”라는 저서에서 한반도를 터키와 함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라고 평가하였다. 제2차 대전 후 미소 냉전 구도에서 양 세력이 충돌하는 최전선이 되었고, 6.25전쟁과 휴전을 겪으면서 분단이 굳어졌다. 분단의 고통 속에서도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과 5천만 국민의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은 놀랄만한 성공을 이루어냈다. 대륙 중국과의 5천 년 관계사에서 중국보다 앞서는 두 세대의 예외를 기록하였다. 

  대한민국의 성공은 크게 보면 인류의 과학기술과 교통통신의 비약적 발전을 배경으로 한다. 지구상의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사라졌다. 뜻만 있다면 지구상 누구와도 실시간 연락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이제 서양 함선의 눈에 띄지 않던 ‘은자의 나라’가 아니다. 10위 권의 경제력과 6위권의 국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자원이 없는 나라 안에서 안주하기보다는 바깥세상에 눈을 돌린 결과다. 전 세계에 8백만 명의 한국인이 나가 있다. 석유파동 시에는 중동지역에 나가서 달러를 벌어들였다. 최근에는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세계 최장 현수교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828미터의 최고층 건물 ‘부르즈 칼리파’를 한국의 기업이 건설하였다.

  한국은 매년 봄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던 보릿고개를 70년대에 해결하였다. 제조업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전 세계에서 먹을거리를 수입해온다. 한국은 개도국으로서는 유일하게 삼림녹화에도 성공하였다. 새마을 운동으로 근면·자조·협동의 기본 정신을 고취하였다. 옛 한국인의 게으름은 완전히 사라졌고, 일본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2차대전 후 탄생한 신생 독립국 중에서 경제발전을 이루고 정치 민주화까지 달성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60년 전 폐허에서 벗어나 빈곤과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수준으로 도약하였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소비생활에 신경 쓰는 복지국가로 변했다. 이제는 문화강국이 되었다. K-칼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고 공정을 추구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자유 국가들과의 연대가 강화되고 국제적 위상과 발언권도 강해졌다. 앞선 선진국을 따라가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서 이제는 새로운 걸 창조해내는 ‘선두주자(first mover)’그룹이 되고 있다. 

  한편 북한은 석탄과 철광석 같은 자원이 풍부하여도 한국 경제의 1/60으로 쪼그라들었다. 땔감으로 나무를 베어내 산사태를 일으켜서 국토는 황폐해졌다. 그 결과 수자원 부족으로 오염된 물로 주민건강을 해치고 있다. 화학섬유 비날론을 개발하였어도, 한국의 섬유산업을 따라오지 못한다. 자력갱생을 고집하는 폐쇄주의 때문이다. 조선시대 ‘은자의 나라’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개인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국제동향에 어두운 나라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 식량이 모자라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주민들은 일할 의욕을 잃었다. 자유 없는 사회에서 생산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신바람이 일어날 리가 없다. 만성적 빈곤 구조가 굳어 버렸다.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미·중 패권 경쟁에서 완충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쓰러져 가는 김정은 정권을 그나마 떠받치고 있다. 탈북민을 강제송환시키는 국제법 위반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몽과 일대일로를 추구하면서 주변국의 굴종을 압박하고 있다. 주변 14개국의 반중 여론이 8할이 넘는데 과거 조공체제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꿈은 달성하기 어렵지 않은가? 독재체제가 계속되면 겉으로는 성장하는 것으로 보여도, 속으로는 실패의 싹이 자라기 쉽다.

  여기에 개방적인 민주사회 대한민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동북아시아가 자유와 인권과 규범을 존중하고 번영을 누리는 평화 지대가 되기 위해 구심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서 글로벌 중추 국가다.  

김석우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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