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한국전쟁 전투모습. 2023.06.27(사진=국가기록원, 편집=조주형 기자)
미군의 한국전쟁 전투모습. 2023.06.27(사진=국가기록원, 편집=조주형 기자)

지난 6월 25일은 6·25 발발 73주년 기념일이었다. 7월 27일이면 정전협정 70주년이 된다. 한국은 이 날을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로 칭하지만 북한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의 침략을 물리친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부른다. 그래서 북한은 매년 6월 25일에서 7월 27일까지를 ‘반미 공동투쟁 월간’으로 정하고 ‘승리’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을 개최한다.

물론, 진실은 그렇지 않다. 6·25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적화통일 전쟁이었으며, 북한이 승리한 전쟁도 아니다. 이렇듯 6·25에 대한 남과 북의 인식은 천차만별이지만, 정전 후 70년에 대한 평가도 정반대다.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뭉친 불패의 핵강국’이 되었다고 자평하지만, 세계인의 눈에 비친 북한은 ‘주민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핵과 미사일을 만들어 한반도 및 역내 안보를 위협하는 불량국가’일 뿐이며, 이와는 달리 한국은 70년 기적의 세월을 거쳐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다.

‘수정주의 전쟁사’라는 역사의 아이러니 

그동안 6∙25에 대한 국내 좌파들의 주장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평양의 논리를 답습하여 ‘북침론’을 펼쳤지만,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은 20만 병력에 전차 242대, 야포 652문, 전투기 211 대 등을 가졌던 반면 국군은 병력 10만에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야포 91 문에 항공기라고는 훈련기 22 대가 전부였다. 이런 군사력으로 남한이 미국과 짜고 북침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한과 미국이 사전에 계획했던 전쟁이었다면 북한군이 한달 만에 낙동강까지 내려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수정주의 해석’이었는데,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1981)에서 남침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미·중 및 미·소 갈등이라는 국제적 요인이 전쟁을 잉태한 것이고 그런 중에 38선 부근에서의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북한이 전쟁을 도발한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수정주의 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내 좌파들은 이를 토대로 남침은 맞지만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것으로 말을 바꾸었다.

당연히, ‘남침 유도설’도 허구다.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서 인민군이 밀고 내려왔던 일, 인민군이 무방비 상태의 국군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이고 나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던 일, 서울을 점령한 9월 28일 인민군들이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들이닥쳐 긴급 후송된 국군 부상병 및 민간인 환자 900여 명을 학살한 일, 트루만 대통령이 허겁지겁 휴가지에서 돌아와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가 결의 82, 83, 84호를 연거푸 채택하여 유엔군을 파병했던 일, 유엔군 참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과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재역전 등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되돌아 보더라도 6·25를 ‘한·미가 남침을 유도한 전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은 전무하다.

여기에 더하여, 한·러 수교 직후인 1994년 러시아가 김영삼 정부에게 공개한 극비문서에는 김일성 주석이 중·소로부터 남침 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왕래했던 기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적지 않은 아이들이 수정주의에 입각한 6·25 전쟁사를 배우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25는 모두가 패배한 전쟁

북한이 6·25를 ‘승리한 전쟁’으로 부르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6·25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재역전된 후 중부지방에서 전선이 교착되고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7월 27일에 종료된 전쟁이었다. 즉, 38선에서 시작되어 현 휴전선으로 마감되어 남북 간 경계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비긴 전쟁’ 이었다. 1,129일 간의 전투를 통해 쌍방 간에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고 한반도가 잿더미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패배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맞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은 전사 13만8천 명, 부상 45만1천 명, 실종 2만 4천5백 명 등의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의 피해는 전사 52만 명과 실종 13만 명으로 추정된다. 유엔군은 전사 3만8천 명, 부상 10만3천5백명, 실종 4천 명을 기록했는데,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미국은 연인원 1,789,000명을 파병하여 전사 33,686명 부상 92,134명 실종 및 포로 8,176명이라는 희생을 치렀다. 인해전술을 사용했던 중공군도 전사 14만 1천 명, 부상 22만 명, 실종 2만9천 명 등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진정 6·25는 모두가 패배한 전쟁이었으며, 인명 피해와 국토파괴 이외에는 얻은 것이 없는 공연한 전쟁이었다.

앞으로도 이어가야 하는 70년 기적의 세월

1953년 7월 27일 포성이 멎은 후 70년 세월 동안 남과 북이 걸어온 길은 판이하게 다르다. 북한은 체제 유지에 모든 것을 걸고 ‘북한식 사회주의’ 하에서 폐쇄경제와 인권·언론 부재의 독재정치를 고수하면서 주민의 삶보다는 군사력을 키우고 핵무기를 만드는데 진력했다. 지금도 ‘남한체제 전복을 통한 주체통일’이라는 지고(至高)의 목표 하에 최대 장애물인 한미동맹을 무력화시키는데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북핵의 궁극 목표도 ‘동맹 무력화 및 주체통일’이다.

이에 비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택한 대한민국은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으며 2018년에 개인소득 3만 달러 이상에 인구가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를 가리키는 ‘30-50 클럽’에 가입하여 서유럽 및 일본과 함께 개인소득 4만 달러 시대를 구가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 70년 동안 한국은 많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공산화된 거대한 아시아 대륙의 끄트머리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1948년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이승만이라는 선각자가 이끈 기적이었다.

6·25 전쟁 동안 미국이 그토록 많은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가본 적이 없는 나라, 만나본 적이 없는 국민’을 지켜준 것도 기적이었고, 이후 한미동맹을 결성하여 안보와 번영을 위한 방패로 삼은 것도 기적이었다. 북한의 군사도발 속에서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박정희의 부국강병 정책이 가져온 기적이었다. 그렇게 하여 1961년 5·16 당시 개인소득 82달러의 한국이 오늘날 세계 10대 부국이 된 것이다.

요즘 이 70년 기적의 세월이 심하게 왜곡되어 아이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음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의 탄생과 생존 그리고 번영에 대해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겉멋’ 방송인들이 각가지 주장들을 펼치는 현실이 자괴스럽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기적을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 기적이 멈추면 번영과 생존도 멈출 것이며, 선대들이 이루어 준 풍요 위에서 ‘철부지 좌파놀음’을 벌여온 일부 젊은이들은 뒤늦게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할 것이다. 그것이 6·25 전쟁 73주년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한 한국 국민이 명심해야할 좌우명이다.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 전 통일연구원장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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