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현재 '엎친 데 덮친' 상황에 처했다고 블룸버그가 24일 보도했다. 중국 경제가 코로나19 락다운 조치, 미국과의 무역 분쟁, 부동산 주택담보대출 사태 등으로 취약해진 상황에서 1865년 이래 최악의 가뭄까지 맞게 된 것이다. 특히 가뭄으로 현대 문명 존속의 기본 요건 중 하나인 원활한 전력 수급이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으로 분석된다.우한에 살고 있는 퇴직자 완진준 씨(62세)는 지난 10년간 거의 매일 양쯔강에서 수영을 해왔다. 그는 이렇게 심한 가뭄은 처음 본다고 밝혔다. 극심한 여름이 아시아의 가장 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에 있어 ‘중국 우한 연구소 유출설’ 역시 검토해 볼만하다는 내용이 담긴 미 국가정보국(DNI) 보고서가 공개되자,이를 둘러싸고 미중 사이에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미 정보당국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코로나19 기원에 대한 검토 보고서 전문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정보 당국은 코로나19 기원에 있어 ‘자연 발생’과 ‘연구소 유출’ 모두 고려해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 정확한 실체와 연관성에 대해서는 중국 측의 협력이나 자료 제공의 부족으로 결론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이번 조사는 조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