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全) 국토가 유린당하고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나온 6·25 전쟁이 71주년을 맞이했지만, 어느새 우리들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져 가는 모양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인용구가 공공연히 쓰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북한에 억류돼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에게는 이미 소용없는 말이 됐다.
기자는 지난 5일 저녁 경기도 일대에 위치한 어느 집을 찾았다. 국군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유영복(92) 씨는 지난 1950년 6·25전쟁에 참전했던 '전쟁 영웅'이다. 정전을 코앞에 둔 1953년, 강원도 금화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국군포로로 47년간 북한에 억류돼 검덕 광산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그는 이날 만난 기자의 두 손을 잡고 "다시 찾아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
그는 이제 몇명도 채 남지 않은, 잊혀져 가고 있는 '국군포로' 중 한명이다. 6·25 전쟁 당시 약 8만2천명(통일부 추산)의 국군용사 중 대부분이 북한에 억류됨에 따라 이들은 국군포로로 명명됐다. 이들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도 귀환하지 못했다. 다만, 이들 중 1994년 조창호(故) 소위를 비롯해 20여명만이 자력으로 탈북해 국내 귀환했다. 유 씨는 지난 5일 기준으로 살아남은 18명의 국군귀환용사 중 한 명이다.
이에 펜앤드마이크는 '6·25 전쟁 71주년'을 맞아 최근 그와 나눴던 이야기 일부 중 이번 호에서는 그의 가족사를 공개한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 조 기자님, 그동안 잘 지내셨수? 저는 하루 하루 다르군요. 예전에 그 때 기자선생 만났을때... 벌써 1년이 됐는데 그렇게 됐네. 많았던 사람들이(국군포로) 이제 몇 사람 안남았어요. 18명인가. 그나마도 누워있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그런. 지금은 거의 코로나19 때문에 모이지도 않지만 모이더라도 이제 몇 사람 모이지도 않을 것 같아요.몸이 불편해서.
-최근에 국방부에서 사람이 왔다고 들었어요. 혹시 (서욱) 장관이나 차관급 고위 인사들이 왔습니까?
▲ 국방부 차원에서 매년 방문은 합니다. 1년에 한 두번 정도는. 그런데, 이번 현충일 행사 말이오. 이전 같았으면 초청장이 오는데, 금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라도 그렇고, 왠만해서는 초청을 안해요. 6월 달이니까 이제 15일경(지난) 방문 올겁니다. 주무관이. 그런데 이제는 그나마도 잘 안해. 이번에 보훈의 달이니까는 그래도 오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언제 올는지는...
-국방부 말고도 다른 행사에는 특별히 참석 안하십니까?
▲ 에이, 다들 건강이 나쁘니까 가질 못해요. 이전에는 세미나 같은 것을 하면 직접 가서 시청도 하고 그랬습니다만...금년에 들어서는 행사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가진 못했어요. 게다가 최근 102살 분이 돌아가셨어요. 조 선생, 다른 분 만나본 적 있소?(허허허) 그런데 말이야, 기자 양반. 나는 조 선생이 다시 올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기사를 많이 쓰시나? 요즘에는 또 어떤 걸 많이 쓰시나?
-저는 뭐, 알고 계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국군포로 송환 문제에 대해 정부가 별로 이렇다할 이야기 자체가 없는 것 같은데요?
▲ 뭐 어쩌겠어. 내가 조 기자에게도 말했지만. 일부 한국 사람 중에는 포로에 대해 '당신 오지 않았느냐'라고 해요. 그 부분을 국회에서 증언한 적이 있는데요. 물론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국군포로에 대해 '한국으로 안가겠다고 해서 북한으로 넘어갔다'라는 시각도 있어요. 여기서 한국하고 북한하고 다른 것은,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야. 마음에 안들면 대통령도 욕할 수 있어요. 반대로 북한은, 사람의 평가 기준이 출신 성분이란 말이죠. 저들은 우리 국군포로 뿐만 아니라 북한의 2천만 동포들 조차도 부류를 갈라놨어요. 크게 핵심층과 적대층인데 그걸 또 세분화해서 40~50종류로 구분해 놨어. 북한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출신 성분을 기본으로 하는 체제인데, 하물며 자기들한테 총구를 겨눈 사람들을(국군포로) 적대 계층이라고 해서 반동분자로 보고 통제했어요. 거기 남아서 가기 싫어하는 아오지, 검덕 광산에 자진 남겠다고 할 국군포로가 있겠느냐고요. 여기서 핵심 분자라는 것은, 빨치산 이런 사람들이고. 기본 계층은 순전히 따라올 사람들이고. 동요분자라는 것은 눈치 보는 사람들이지.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면서 흔들리는 계층이고, 적대 계층인 자본가 후손들과 같이 분류되지요. 국군포로는 아예 초장부터 적대 계층이지. 검덕 광산의 역사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는 문이 없어요. 대대손손 거기서 종사하다가 죽는거죠. 이런 데를 누가 스스로 가겠다고 하겠냐고요. 물론 공민증도 강제로 발부하는데, 이는 영구적으로 부려먹기 위한 술책으로 부여했단 말야. 다 말하면 이해 못하는 분들이 많을 수도 있어요. 귀환할 적에 왜 안왔냐고 의구심 갖는 사람들도 아직까지도 있습니다. 하여간 참... 어쩌겠어요.
-북한에서 47년간 억류됐으면, 공민증이라도 줬다는 셈인데, 적대 계층이지만 북한 주민으로써 일종의 '계급' 속에 속하게 됐다고 봐야 하는 건가요?
▲ 내가 여기 사진들을 보여드리리다. 여기 보면... 내가 이렇게 찍었던 게 60줄(살) 즈음이야. 그때 공민증을 받은 상태였어. 내가 56년까지 어디를 못가다가, 57년도에 우연하게 북한에서 어머니를 만났어요. 그 때 어머니가 북한에 계셨어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있었어. 어머니 친정이 황해도 쪽이었어. 38선 그으면 이남인데,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북한 땅이 됐어요. 피란길에 친정에 와 있던 어머니 땅이 곧 북한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참 그렇게 될줄 누가 알았겠어...그렇게 토굴에 살던 어머니를 북한에서 만났는데, 동생들도 만났어.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공민증을 받았으니 가족들 먹여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수? 일을 안할 수가 없지. 그런데 이놈들이 정말 끝까지 가족들을 아예 사람 취급도 안하고... 내 마누라는 거기서 끝내 세상을 떠났고. 참...북한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랑하던 내 아내도 있는데, 한국에는 아버지가 기다리잖아?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북한에 남아야겠소, 한국에 가야겠소?
-참 뭐라 드릴 말씀이...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나는 거기서 공로 훈장도 받으면서 공로자가 됐지마는, 물론 어머니도 만났고 동생도 만나고, 이거 아들이지, 그때 스무살때고. 여기 딸이고. 정말 일했어요. 어차피 머물수밖에 없게 됐으니 동생들도 있잖아. 기를 펴게 해줘야지 않겠어요? 어찌됐든 공민증을 받게된 이상 북한에서 앞으로 남북이 화해될 때까지 동생들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했는데, 내가 있을 수 없는 사회라는 걸 매순간 느꼈어요.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죽더라도 돌아가는 게 옳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만났어. 북한에서 47년을 살았는데, 한국에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가 있다 이거야. 국가정보원이 있어서 어디 끌려가거나 그러면 살아나올 수가 없다고들 했는데, 그때 내가 47년간 살았던 그 것으로 인해 가면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던 것도 사실이에요. 비록 내가 국군 소속으로 나가 죽도록 싸우다 포로가 됐지마는, 국정원에서 나를 어떻게 대할까... 그런데 한국은 내게 그런 것을 묻지 않았어요. 여기서 21년 동안 사람답게 살 수 있었어요. 그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러다 문득 억울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모습을 증언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 내 자체가 능력이 부족하고 배움이 부족하니 잘하지는 못했지만... 기자 양반, 그건 참고로 해요. 그리고, 이건 전역할 때 사진이야.
-이 부대 마크는 육군 5사단 아닙니까?
▲ 5사단 28연대입니다. 이게 전역사진이지. 서울에 와서 이렇게 전역 사진을 찍었어요. 2000년 10월이에요. 그 땐 생전에 아버지를 모시고...그래도 살아 돌아와서 아버지를 만났어요. 뭐랄까 '당신은 그래도 부모들에게 불효자는 아니지 않느냐'라는데. 아버지와 가족들이 그 때 참... 하여간 조기자님 활동에 도움이 좀 되면 좋겠어. 훈장하고 사진 이런건 다 여기에 있어요. 여기 와서 대통령 다섯 분을 만났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건 국회의장도 있고. 여기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박사 논문도 썼습니다. 이 분도 기자라던데. 그렇게 박사 합격했어. 기자 선생도 이런 문제에 대해 대학 강의를 나가게 되면 참작을 해서 박사 논문도 좀 쓰고. 앞길이 창창한데 안보 분야를 다룰 때 이것도 참고를 좀 해봐요.
-북쪽에 어머니가 계시고 그랬는데, 여한은 없는지...?
▲ 정말 여기 와서 대통령 접견도 하고 그 후에 아들도 데려오고. 나를 돌봐주고 하니 여한은 없습니다만, 너무 늦게도 왔고. 21년됐어요. 70에서야 왔으니 나라에 도움이 또 되지도 않고요. 저는 한국에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자고 했었던 사람입니다. 그나마도 북한에 억류됐다가 반세기 만에 갑자기 가족을 만났습니다. 한국에 아버지가 계시고 살아서 돌아오라고 기다리시는데 말이에요. 상황이 이럴진대 내가 가족들 책임지고 있었고, (한국으로)넘어올 때 설사 죽는다해도 원망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운이 따랐는지... 조 선생, 어디 가서 강의를 한다면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용감히 싸우다가 끌려갔지만 이제 내가 뭘 더 바라겠소? 이런 기구한 운명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내가 못하는 것을 언론이 와서 국군포로 문제의 실태를 밝힌다는 데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조주형 기자 chamsae9988@pennmike.com
- [펜앤 단독 인터뷰①] '국군포로 50년' 유영복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 잊지 못한다"
- '국군포로송환' 임종석 경문협 상대 추심 소송 돌입...경문협 사용처 '김일성종합대학'?
- [탐사기획] 박원순 서울시의 수상한 대북지원사업-시민단체 '천태만상' 실체 추적
- [2021 대북정책] '北 도발' 빠진 文 정부 '남북관계발전계획' 공개···北 퍼주기 '예고'
- [탐사기획] 靑 신설 방역기획관 기모란 임명은 북한 배려?
- [탐사기획] 서울시, 평양 남북 공동올림픽 '강행'…與 박영선·임종석·이인영이 배후?
- [탐사기획]민주당 추진 北 개별 관광...현재도 제3국 경유 北 여행사 상품 버젓이 노출
- 6·25 전쟁 71주년 맞아 격전지 방문하는 국민의힘 김기현·한기호
- [6·25특집①] 현장르포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돌아오지 못한 10만명, 아픔은 계속
- [6·25특집②] 北 억류 50년 국군포로 단독 인터뷰···"우리를 잊지 말아달라"
- [펜앤 인터뷰] '19주년 맞는 제2연평해전' 예측했던 제5679대북감청부대장의 피끓는 성토
- 최고령 탈북 국군포로 이원삼 씨 별세...남은 생존자 16명
- [7·27 정전협정 68주년] 정전체제, 26년 전 반쪽짜리 '전락'···文·與, 굽실댔다
- 국민의힘, 오늘 오후 11시 '안보 분야' 검증 토론회···북핵·국군포로·한미동맹관 '검증대'
-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 사진전, 오늘부터 16일까지 국회 의원회관서 개최
- [단독] 尹정부 주도 국군포로 귀환용사 靑 관람 행사, 15일부터 1박2일 추진
- [6·25특집③] 北억류 국군포로 귀환용사 단독 인터뷰 "추모탑 세워 우릴 잊지 말아달라"
- '귀환국군포로' 이규일 씨 오늘 발인···尹, 그의 생전소원 '추모비' 추진할까
- 尹정부, '국군귀환용사 추모비' 건립 추진···오랜 비원(悲願) 이제 풀린다
- [펜앤 단독 인터뷰] '北억류 50년' 국군포로 귀환용사 유영복 씨 "부디 잊지 말아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