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의 파일들을 정리하던 중 지난 2003년 작고한 이병형 장군과의 대담 파일을 발견했다. 이 장군과의 대담은 1997년, 이 장군이 은퇴생활을 하고 있던 주문진을 찾아가 나흘 간 진행했는데, 그 대담 내용을 꺼내 읽으면서 이 분이 지금 이 난세에 살아계셔서 군을 이끌게 된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문재인 정부의 국방부장관이란 사람이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을 기억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기 위한 서해 수호의 날에 대해 “서해상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남북 간의 충돌들, 천안함을 포함해, 여러 날짜
필자는 지난 3월 15일 '박정희 시대의 공안사건은 모두 조작이었나?'란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이 글은 그 후속편에 해당한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제1차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 아니라 실재했던 사건이란 증언을 독자 여러분에게 보다 확실하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 증언자는 박범진 전 국회의원이다.박범진 씨는 조선일보 기자,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지내다가 정치계에 진출하여 14~15대 의원을 지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제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기자는 얼마 전 선전선동 관련 칼럼을 발표한 적이 있다. 중차대한 시기에 또 다시 비슷한 주제의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 문제가 좌우 이념대결에서 무엇보다 핵심 이슈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한국 사회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사건·사고들을 열거해 보자.세월호 침몰, 광우병 파동, 4대강 사업, 천안함 폭침, 여중생 장갑차 사망…. 급기야 최순실 푸닥거리에 껌벅 속아 넘어간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횃불·촛불·단두대 끌고 광화문에 몰려나와 난장을 벌였다. 촛불에 에워싸인 채 벌인 가수들의 찬양 공연과 횃불시위는 이 나라 문화·
“박근혜·이명박·전두환·노태우. 이들의 공통점은?”이런 시험문제가 출제되었다고 치자. 정답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감옥에 갔다는 점이다.우리 현대사에서는 이보다 더 혹독한 운명에 처했던 대통령들도 있다. 박정희는 재임 중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절명했고, 노무현은 퇴임 후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 어디 그 뿐인가?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시민혁명으로 하야, 장면은 쿠데타 발생하자 수녀원으로 도주 후 사임, 최규하는 전두환에게 토사구팽, 전두환·노태우는 퇴임 후 감옥행, 노무현 투신자살, 이명박 퇴임 후 수감, 박근혜 탄핵 수감….
황교안의 자유한국당 체제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3월 11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자유한국당이 정당 지지율 30%를 뚫고 나가 30.8%를 기록했다. 이틀 후인 3월 13일에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수석대변인” 연설로 지지율이 32.4%로 좀 더 상승했다. 한국당 지지율이 30%대를 기록한 것은 촛불시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6년 10월 2주차(31.5%) 이후 약 2년 5개월 만의 일이다.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다. 긍정평가보다 부정평가가 더 높게 나오는 데드크로스(de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3월 6일 희한한 결정문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수령한 배상금을 반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너무 가혹한 처사이니 구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인권위는 “부당이득금 반환 문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소하고 국가의 국민에 대한 보호책임을 실현할 수 있는 완전하고 효과적인 구제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해 달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이다.인민혁명당 재건위, 사형집행, 과거사 진상조사의 조사 결과 고문조작, 재심 무죄, 국가 배상금…. 이러한 키워드가 조합되면 일반인의 상
우리 사회에 동학에 대한 신기루가 횡행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급기야 서울 종로 한복판에 전봉준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동상이 서게 된 계끼는 2016년 8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북 전주의 동학혁명기념사업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이때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순국한 자리에 동상을 세우자는 제안을 수용하면서 동상 건립 작업이 본격화됐다. 이때부터 국민 성금 2억 7천만 원을 모았고, 동상은 원로 조각가 김수현 충북대 명예교수가 제작했다.지난해 4월 24일 종각 맞은편 영풍문고 앞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은 일본영사관에서 조사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소위 ‘진보적 학자’로 불리는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박근혜 탄핵을 몰고 온 광화문 일대의 촛불시위를 ‘11월 시민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시민들이 단순히 박근혜 퇴진을 넘어 헬조선 탈피 등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항쟁이 아니라 ‘시민혁명’이었다는 것이다.손 교수는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박근혜를 ‘최악의 대통령’으로,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천오백만 촛불이 상징하는 최고의 시민’이라고 자리매김했다. 아직까지는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
문재인 대통령의 ‘친일청산’ 관련 발언이 레드 라인(red line)을 넘었다.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열지를 않나,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발언했다. 임시정부 출범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하려다가 여론이 너무 좋지 않자 슬그머니 폐기했다.심지어 지난 2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검사와 경찰은 강압적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며 “
1. 분석의 대상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12월 16일, 중국 방문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면서 “3·1운동 100주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고, 그것은 곧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 [중국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방문 2017. 12. 16)이라고 연설했다.대한민국 건국일이 1948년 8월 15일이란 사실은 이미 모든 논쟁을 통해 다 밝혀진 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국의 건국일을 어떠한 법적·제도적·절차적 검증도
하늘도 무심하시지 않은지 트럼프 미 대통령과 북한의 3대 세습 군주 김정은의 하노이 회담은 개판이 났다. 무려 66시간 ‘고난의 기차 행군’ 끝에 하노이에 도착한 김정은은 이제 귀가 교통편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하지만 아직 ‘결렬’을 환호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귀국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과의 중재 역할”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문-김은 판문점에서 깜짝 정상회담 이벤트를 벌여 여론의 주도권을 회복한 바 있다.코너에 몰린 김정은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또 한 번의 핵실
I. 건국일 논란“우리는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폴란드 역사학자 콜라코프스키의 말이다. 조선일보는 2006년 8월 14일 대한민국의 건국에 관한 국민의식조사결과를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지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 나라 국민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표1] 참조).2015년 8월 19일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의 광복 70주년 관련 국민의식조사결과는 다욱 흥미로다. “대한민국 건국시점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국민들의 답변은
대한민국은 반도국가입니다. 반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태를 묻고 살아야 했던 한민족은 늘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한 눈으로는 대륙을 바라보아야 하는 중간지대적 속성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왔습니다. 로마가 발흥한 이탈리아가 그랬고, 유럽에 수많은 도시국가를 창조한 그리스가 그랬습니다.이탈리아 중부의 도시국가로 출범한 로마는 유럽의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로마가도를 건설했고, 해적을 퇴치하고 해상로의 안전을 확보하여 지중해를 자국(自國)의 내해로 만들었습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연 결과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미국서 돌아온 이승만의 귀국 일성은 “모든 정당과 당파를 초월하여 한 개의 덩어리로 만들어가지고 우리 한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찾는다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이보다 한 달 여 뒤인 같은 해 11월 23일 김구의 귀국 일성은 “혼이 돌아왔는지 육체까지 가지고 돌아왔는지 그저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다”였다.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왔던 독립운동 지도자 백범 김구는 자택인 경교장(현재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이날 6
박정희 집권 18년의 의미-박정희 재임 18년, 한국사에서 ‘예외의 시대’였다일본의 한국 정치 전문가인 다나카 메이(田中明)는 1992년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정치를 투시한다』에서 박정희 시대를 ‘예외의 시대’라고 명명했다.(다나카 메이(田中明) 저·윤학준 역, 『한국정치를 투시한다-한 일본 지식인이 본 한국』, 길안사, 1995, 10쪽). 그 이유를 다나카 메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서기 1270년 고려 무인정권의 몰락 이후부터 조선 500년 등 한민족 700년의 역사는 글 읽는 문과(文科)적 지식인을 가장 우대하고 부가가치
2월 25일 펜앤드마이크와 이승만학당이 공동개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제문을 준비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과 글을 추적해보면 그 논리의 인식체계가 한길사가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자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좌파 학자들이 쓴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탐독하고 운동권이 된 인물이다. 그는 2003년 3·1절 기념식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고 대한민국에 모욕을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조선일보 2월 18일자에 미개재된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의 글입니다.자유한국당이 ‘5·18 프레임’에 갇혔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는 않았을 텐데, 공교롭게 이 시점에 ‘조갑제의 광주사태…40년 동안 다섯 가지 루머와 싸워 이긴 이야기’가 출간됐다.조갑제(74)씨는 국제신문 기자 시절 병가(病暇)를 내고 광주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해직됐던 인물이다. 그 뒤 월간조선으로 옮겨 ‘5·18 광주’ 심층취재를 계속했다. 5·18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그는 발언권이 있다고 할 수 있다.-광주 5·18과 관련된 루머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Ⅵ. 기 타안병하 경찰국장 면직 처분※ 안병하(28年, 강원 양양) : 육사 8기, 총경 특채, 경무관 승진(’71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5회 내용은 ‘군 재진입 후 경찰 활동(5.27~)’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경찰은 5월 27일 새벽 5시 계엄군
김지하 시인이 쓴 ‘1974년 1월’이란 시의 일부다. 김지하는 박